아름드리 은행나무와 같이 광활한 우리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침묵의 친구>

by 김진만
<침묵의 친구>(Silent Friend, 2026)
20260404_185431.jpg
20260404_185729.jpg



아시아의 명배우 양조위가 처음으로 찍은 유럽 영화 <침묵의 친구>를 양조위 배우와 일디코 에네디 감독의 무대인사와 함께 보았습니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 헝가리 출신의 일디코 에네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작년 베니스영화제에 진출하며 역시 해외에서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독일의 한 대학교에 서 있는 20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100여년의 세월에 걸친 세 사람의 시공을, 심지어 공간까지도 초월하는 교감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그 중심에 있는 은행나무와 같이 무척 느긋한 호흡으로 우정의 어떤 형태를 탐구해 나갑니다. 각기 다른 시대 상황과 그 속에 놓인 인간, 그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상호작용을 깊은 울림과 함께 그리는 이 영화는 아마도 보고 난 뒤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각과 지각, 감정이 우리의 뇌 속에 어떤 지도를 그리는지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자 토니(양조위)는 벨기에의 한 대학으로 초빙되어 강의를 맡게 됩니다. 수많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연구와 생각을 전파하면서, 동시에 군중 속의 고독한 개인이 되어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 뜻밖의 변수가 닥쳐오니 그것은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이었습니다. 모두가 떠나고 텅 빈 학교, 교수진을 위해 마련된 숙소에서 머물된 토니는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뜻하지 않게 홀로 그 학교에 머물게 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의 보안직원인 안톤(질베스터 그로트)과 단 둘만 남게 되죠. 토니는 그 학교의 주인이 된 듯 학교 안을 배회하던 토니는 어느날 식물원에 서 있는 200년 된 은행나무를 눈여겨 보기 시작하고, 그 나무에게서 무언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토니는 식물과의 소통에 관해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 프랑스의 학자 알리스의 영상을 찾아보곤 그녀와 화상으로 접촉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세기에 걸친 삶을 산 은행나무와의 교감을 시작한 토니. 그러나 그렇게 종을 초월한 교감을 감각한 이는 그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908년 이 학교 최초의 여학생이 된 여인 그레테(루나 웨들러), 1972년 사랑을 따라 꽃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된 청년 하네스(엔조 브롬)도 있었습니다. 저마다의 고독 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그들은 고요하지만 깊이 가지를 뻗어나가며 세월을 버텨 나가는 은행나무와 맞닿아, 어느새 인간의 공동체를 넘어서고 고독을 초월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침묵의 친구>(Silent Friend, 2026)


<침묵의 친구>는 첫 장면부터 우리에게 생소한 감각을 전합니다. 1832년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은행나무가 처음 발아하던 순간을 확대하여 보여주는데, 마치 알을 깨고 생명체가 부화하듯 소리를 내면서 씨앗을 깨고 싹을 틔우는 그 모습이 어릴 적 학교에서 배웠을 이미지임에도 무척 낯설고 일면 충격적으로까지 다가옵니다. 늘 가만 있는 듯 조용히 존재해 온 것만 같았던 나무가 저렇게 약동하는 생명체였다니. 이런 영화의 시작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우리가 어떤 템포로 지켜봐야 하는지를 규정해 줍니다. 인간의 속도와 호흡으로 지켜보지 말 것을, 고요하게 멈추어 있는 듯 하지만 시선을 거두지 않고 호흡을 멈추지 않는 식물과 같이 지켜볼 것을 제안하죠. 그렇게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깊이 들여다 보는 태도를 견지하게 하며 식물이 역동하는 내면을 품고서 치열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능히 가늠케 만듭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언제까지고 몰랐을 그런 식물의 동력이, 세 시대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들과 교감하며 고독을 돌파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게 되죠.


영화 속 세 시대의 세 사람은 각기 다른 고독 속에 있습니다. 1908년의 그레테는 대학 최초의 여학생으로서 숨쉬듯이 이루어지는 차별과 혐오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식물을 인간의 신체에 빗대어 수치스런 발언을 서슴지 않는 교수진들의 모습에 식물학에 대한 그레테의 탐구자로서의 진의는 왜곡당합니다. 그런 그에게 나무는, 제약을 뚫고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표현하려는 존재로서 어쩌면 자신과 닮아있는 존재로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1972년의 하네스는 세상에 자신의 외침을 전하는 것이 젊음의 덕목일 것만 같은 시대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독한 교감을 식물과 이어나갑니다. 사랑을 좇아 마주하게 된 어떤 교감의 장이 실현 가능한 것임을 하필이면 아무도 없을 때 홀로 깨닫는 바람에, 그것은 눈부신 발견이자 남들에겐 정신나간 소리로 치부당할 비밀이 되고 맙니다. 2010년의 토니가 마주한 고독도 시대의 그림자 아래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을 팬데믹의 터널 한가운데에서 토니는 타국에 있다는,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중의 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물론 그들 각자의 곁에는 소통의 창구가 되는 타인들이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고독을 깨뜨리는 존재가 꼭 사람만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식물에 자신을 투영하려 노력하고, 누군가는 식물과 대화하려 노력하고, 나아가 누군가는 식물의 내면에까지 귀기울이려는 노력으로 각자의 고독을 깨뜨리죠. 이 종을 초월한 소통은 목소리로 빼곡한 세계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는, 고요한 세계에 홀로 있을수록 더 잘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고독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듯한 위로로 다가옵니다.


<침묵의 친구>(Silent Friend, 2026)


차라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훨씬 쉽지 소통은 물론 반응도 포착하기 힘든 식물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이 어려운 연기를 납득하게 됨으로써, 왜 국경을 초월하여 양조위가 이 영화에 캐스팅되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 이야기 중 하나의 주인공이자 시대를 초월한 유대의 이야기를 현대의 우리에게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토니를 연기하는 양조위는 이번에도 열 마디 말보다 눈빛과 얼굴로 형언할 수 없는 고독 그 자체의 조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영화가 때때로 초자연 현상 같은 이미지를 보여줄 때조차도 그것이 마치 실재하는 자연 현상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시대와 인간의 공기를 머금은 연기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2백년 된 은행나무 못지 않게 깊이 뿌리내린 그의 연기와 함께 각기 다른 시대로 줄기를 뻗어나가는 1908년 그레테 역의 루나 웨들러, 1972년 하네스 역의 엔조 브롬도 종을 초월한 교감 속에서 자신의 고독을 돌파해 나가는 인간의 벅찬 감정을 빼어나게 그려냅니다.


은행나무의 고요한 자태와 끊임없는 시선을 따라하기라도 하듯 어느새 짧지 않은 러닝타임의 부담마저 덜어내고 영화를 응시하고 있는 우리에게 <침묵의 친구>가 건네는 위로는 무척 특별합니다. 드넓은 세상과 유구한 시간 속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우리'는 사실 언어와 종, 시간까지 뛰어넘으며 얼마나 거대한 품 안에서 함께 하고 있는지. 2백살이라는 나이마저도 한창 때일 아름드리 은행나무의 그 침묵 어린 풍채가, 늘 말 많고 분주한 얼굴로 고독을 이겨내려고만 하는 인간들을 그 넓고 조용한 품 안으로 들이는 것만 같습니다. 나무가 심어져 있는, 꽃이 피어 있는 그 어느 곳에라도 당장 나가본다면 그 순간 이미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내 존재에 대한 반응이 어느 때든 어딘가에든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품어보게 하는 각별한 존재감을 지닌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침묵의 친구>(Silent Friend,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