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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Apr 18. 2022

스릴러보다 더 위태로운, 일하는 여성의 내일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앵커>

<앵커>(Anchor, 2022)

<앵커>는 천우희 배우가 앵커 역할로 나오는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것 외에는 스토리를 짐작할 수 없는 영화였는데,

영화는 외부의 사건보다 내면의 심연으로 향하는 미스터리로 불안과 긴장을 시종일관 팽팽하게 형성합니다.

하지만 이 불안과 긴장의 감정이 단지 극적 재미를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투영한 것임을 알게 될 때,

영화는 흥미진진한 장르물에 머물지 않고 긴장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개인이 중심에 선 사회적 드라마가 됩니다.


세라(천우희)는 장기간 YBC 9시 뉴스 메인 앵커 자리를 도맡아 온 프로 방송인입니다.

아나운서로 입사했지만 기자로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뉴스에 대한 열의를 불태워 온 그녀이지만,

그럼에도 개편 시즌은 언제 어떤 후배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시기입니다.

그런 세라가 뉴스 생방송을 불과 몇분 앞둔 상황에서 의문의 제보 전화를 받습니다.

오직 세라와 통화하기를 원하는 그 제보 전화 속 여자는 자신이 누군가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곧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는데, 그 죽음을 다른 누구도 아닌 세라가 취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세라는 또 하나의 장난전화이겠거니 하고 전화를 끊지만, 이상하게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세라의 앵커 경력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온 어머니 소정(이혜영)은 이게 어쩌면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며

직접 취재에 응할 것을 세라에게 강권하고, 결국 세라는 홀로 취재에 나섰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이후 세라에게는 제보자의 모습이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그녀의 앵커 경력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세라는 제보자의 주치의였다는 정신과 의사 인호(신하균)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인호도 의심스럽고 혼란에 휩싸인 자기 자신마저도 의심스러운 가운데, 세라가 마주할 진실은 무엇일까요.


<앵커>(Anchor, 2022)


제목에서도 내세우듯 <앵커>가 배경으로 삼은 직업 세계의 주제는 방송 뉴스 앵커입니다.

방송 뉴스를 꾸준히 시청해 온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법합 그 세계의 공기를 영화에서도 충실히 반영하고 있죠.

일부 변화도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다수의 국내 방송 뉴스에서 남성 앵커는 기자고 여성 앵커는 아나운서입니다.

이는 즉 다수의 뉴스에서 저널리스트의 이미지는 남성 앵커에게, 스피커의 이미지는 여성 앵커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흔히 저널리스트에게는 고유의 시각을 견지한 전문의 이미지가, 스피커에게는 보기 좋은 비주얼과 듣기 좋은 멘트 소화력의 이미지가

곧잘 덧씌워진다는 걸 생각하면, 방송 뉴스에서 여전히 여성 앵커라는 포지션이 마주하는 역할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바탕에 두고 있다 보니 영화에서 개편 시즌 물갈이의 대상으로 대번에 언급되는 자리 역시 여성 앵커입니다.

신뢰와 주관보다는 비주얼과 화술이 평가 요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교체 가능한 대상으로 판단되는 것이죠.

굳이 앵커가 아니더라도 현대 한국의 일하는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 등을 이유로 반드시 경력 단절의 기로와 마주해야만 하는데,

영화는 여기에다 특유의 불안과 긴장을 안고 있는 여성 앵커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현대 한국의 일하는 여성들이 처한 현주소를 더욱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비춥니다. 


<앵커>가 돋보이는 점은 이러한 현실을 리얼리즘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장르적 형식에 적용시켰다는 점입니다.

약간의 놀람 효과를 곁들인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는데, 이게 꽤 매끄럽게 결합한 느낌입니다.

이런 접근을 시도하는 영화는 자칫 장르적 요소를 추구할 때와 메시지를 추구할 때를 기계적으로 나누기 쉬운데,

<앵커>는 인물이 사건에 개입하고 사건이 인물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 과정에서 인물의 현실과 심리가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세라가 의문의 제보자가 건 전화에 반응하여 사건을 추적하게 되는 계기도, 미심쩍은 인호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도

직장인으로서 당연한 야망을 가진 세라가 품게 되는 당연하지 않은 불안과 의심 때문입니다.

아나운서에서 기자로 전직하면서까지 어렵게 이뤄 온 지금까지의 업적이 갑자기 없던 것처럼 될지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심은 곧 세라가 바라보는 사건의 진실과 덧씌워지며 사건의 향방을 궁금케 합니다.

영화가 미스터리 요소를 아주 치밀하게 구축했다는 느낌이 들진 않지만, 인물이 내내 품고 있는

위태로운 내면을 잘 오버랩시켰다는 느낌이 들고 그 부분에 주목하니 몰입감이 꽤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앵커>(Anchor, 2022)


<앵커>는 천우희 배우 원톱 주연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녀를 포함한 모든 주연 배우들이 팽팽하게 카리스마를 발산합니다.

뉴스 앵커가 말과 행동에서 보여주는 특유의 정제된 톤 앤 매너부터 세라라는 개인으로서 표현하는 흔들리는 내면까지,

천우희 배우는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연기를 모두 납득되게 소화함으로서 영화가 동력을 갖게 하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합니다.

누구보다도 빈틈없고 침착해야만 하는 앵커의 외면과 누구보다 구멍 뚫리고 위태로운 인간의 내면을 모두 품은

세라의 모습을 연기하는 그녀는 스릴러다운 긴장감과 공포감, 드라마에 걸맞은 현실감과 설득력을 모두 획득합니다.

한편 세라가 의심을 품게 되는 또 다른 대상인 정신과 의사 인호를 연기하는 신하균 배우도 영화를 든든하게 받쳐 줍니다.

날카로운 심리 스릴러의 틀 안에서 그가 맡은 인호라는 캐릭터는 다소 결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양면성을 품은 특유의 차분하고 냉철한 연기가 지속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며 극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 가운데 세라의 어머니 소정을 연기한 이혜영 배우는 기대에 걸맞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발휘합니다.

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만 같은 그녀의 단호한 모습은 한편으로 두려우면서도, 

굴복할 수 밖에 없을 듯한 개연성을 이미 연기로 풀어냄으로써 관객을 놀라게 합니다.


<앵커>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려는 한국 여성들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섬뜩하게 비추는 동시에, 그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만 한다는 절박한 바람 또한 안고 있는 영화입니다.

모호해져만 가는 사건의 진실 앞에서 더욱 절실하게 자신을 붙들려 하는 영화 속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이 영화의 장르는 어쩌면 자신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직장 여성의 불안한 나날에 대한 가장 적합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Ancho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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