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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May 01. 2022

우연이 눈앞을 가려도 언어가 길을 밝히리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우연과 상상>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


작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우연과 상상>은

3편의 에피소드를 엮어 제목처럼 불쑥 끼어든 우연이 일으킬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여 그려냅니다.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어 이 영화가 세번째로 보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인데,

확실히 그가 '말의 마술사'라는 걸 깨닫게 하는 영화이면서도 재미로는 가장 만족도가 큰 영화였습니다.

대화로 서사를 변화무쌍하게 이끌어 가는 역량과 그 가운데서 인간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함께 느낄 수 있었네요.


영화는 세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입니다.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작품 작업으로 만난 절친 츠구미(현리)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츠구미의 새로운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츠구미는 첫 만남부터 그 남자와 너무나 통하는 것이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꼴딱 새며 이야기를 나눴으며, 다음 만남을 몹시 기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메이코는 츠구미의 그 새로운 남자가 2년 전에 헤어졌던 자신의 전 남친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임을 깨닫습니다.

'문은 열어둔 채로'라는 제목의 두번째 에피소드에는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와 학생 나오(모리 카츠키)가 등장합니다.

늦깎이 대학생활 중인 나오는 최근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한 세가와 교수를 축하하고자 그의 사무실을 찾는데,

세가와의 작품 중 한 구절을 그의 앞에서 읽어내려가는 나오에게는 사실 다른 꿍꿍이가 있습니다.

세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 번'에서는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라는 여인이 고등학교 동창회를 찾습니다.

도쿄에서 센다이까지 날아와 그리 흥미 있지 않은 동창회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나 싶던 나츠코 앞에

오랫동안 만나기를 고대해 온 동창(카와이 아오바)이 나타나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집으로 향합니다.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


<우연과 상상>의 세 이야기는 서로 간에 직접적인 접점을 갖지 않지만 공통점은 갖고 있습니다.

인물들 모두 기가 막힌 우연과 마주하면서 어떤 방향으로든 떨치기 힘든 파장을 겪는다는 점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때로 남발되는 우연을 우리는 보통 '극혐'하게 마련이지만, 실은 우리 삶에서 무수히 우연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우연들이 때로 우리 삶의 방향을 아예 돌려놓기도 하기 때문에, 이야기들의 이런 공통분모는 과히 납득이 가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기습적으로 들이닥치는 우연 앞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아니면 또 다른 우연의 연쇄를 불러오며 어떤 종잡을 수 없는 결과로 인도하는지를 상상해 봅니다.

영화는 그 상상의 도구로 말, 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우연의 기습 속에서 휘청이며 방황하기도,

혹은 시야를 가다듬고 마음을 다잡기도 하는 사람들을 꾸준한 말과 끊이지 않는 대화 속에서 그려내는 것이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세계적인 거장으로 발돋움하게 한 <드라이브 마이 카>가 바로 이어서 나왔음을 떠올려 보면,

이 영화는 그처럼 대화를 통해 사건을 만들고, 에피소드를 구축하고, 이야기를 짓는 일에 대한 일종의 예행연습 같이도 보입니다.

관객 역시 각 40분 가량 구성된 에피소드를 부담없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복잡한 함의 없이, 철저히 눈앞의 현상에 집중하면서요.


드라마보다도 더 짓궂게 다가오는 우연 앞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결과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갑니다.

그 결과는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바꾸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에 머물 수도, 생각도 못했던 방향으로 삶을 바꾸어 버릴 수도,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라도 내 자신이 변화하는 결과에 다다를 수도 있습니다.

액션 스타나 행위예술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 말이나 글로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한번 들어선 장면의 편집을 최소화하면서 말과 대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요동치는 운명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발화든 행동이든 순간순간 짐작되는 인물들의 다음 스텝이 수면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는 듯한 긴장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쓴맛을 다시게도, 탄식하게도, 따스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도 하며 생각보다 더 풍성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영화나 소설, 희곡처럼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작 예술은 마치 당연한 요소인 것처럼 '개연성'을 찾아 헤맬 수 밖에 없는데,

영화는 이러한 개연성과 오히려 배치되는 요소임에도 우연의 가능성과 전개, 결과에 대한 섬세한 터치로 끝내 수긍하게 만듭니다.

사실 우리 삶을 더 자주 움직이는 것은 탄탄하게 짜여진 개연성이 아니라, 논리 없이 단호하게 들이닥치는 우연임을 깨닫게 하죠.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


그런데 영화를 보고 기대 이상으로 감동을 받는 지점은, 이런 영화의 태도에서 인간을 긍정하는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모두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연 앞에서 드라마틱한 결과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섣부른 판단이나 철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꼿꼿이 버티고 선 자신을 발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리듬과 높낮이로 글자마다 찍어 누르듯 분명하고 풍성하게 오가는, 이제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영화의 시그니처가 된 듯한

이 대화의 결은 그처럼 무작위로 휘몰아치는 우연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려는 나름의 방법 같습니다.

언어를 둘러싼 실험을 다채롭게 펼쳤던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처럼, 감독은 우연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도

언어로 길을 밝히기에 비로소 우연이 우리를 마냥 휘두르지 못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하는 듯 합니다.

후루카와 코토네, 현리, 나카지마 아유무, 모리 카츠키, 시부카와 키요히코, 카이 쇼마,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 등

새롭고도 현실적인 얼굴의 배우들이 그처럼 언어로 우연의 늪을 탐색하는 인간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냅니다.


<우연과 상상>은 첫번째 에피소드 제목처럼 마법 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영화입니다.

2~3명의 인물을 데리고 철저히 대화 위주로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건들을 그리는

3개의 단출한 이야기로 롤러코스터 같은 긴장과 재미, 생각보다 더 너른 품의 감동을 안기니 말입니다. 

우연이 빚어내는 뜻밖의 이야기들이 웃음을 일으키거나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와중에도,

그 곡절들을 거쳐 마주하는 것이 결국은 얄궂은 세상을 의연히 마주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니 이 또한 마법일까요.

생각 복잡하게 하는 영화일까 싶었다가 뜻밖의 흐뭇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왔으니 이것도 영화가 선사한 마법이려나요.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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