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비롯핸 5개 상을 받으며 그해 가장 주목받는 한국 독립영화가 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결코 만나기 쉽지 않은 에너지로 관객을 기선제압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시간동안 느슨함 없이 긴장감 가득히 관객을 이끌고 갑니다. 험한 말과 폭력과 증오와 분노가 난무하는 어느 모녀의 관계는 분명 비정상적인 영역에 속해 있겠지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팽팽한 서스펜스마저 느껴지는 그 관계는 곧 보편적인 가족 관계의 일면을 날카롭게 찌르는 칼날로 다가옵니다. 지켜보게 될 새로운 배우들과 감독까지 얻게 된 이 영화를 올해 빼놓지 말아야 할 영화 리스트에 추가하게 됩니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단둘이 사는 엄마 수경(양말복)과 딸 이정(임지호)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사건건 다툽니다. 수경은 20대 후반인 이정을 지금도 걸핏하면 때리고 괄시하는 한편, 밖에만 나가면 꽃다운 연애와 우정 속에서 돋보이는 존재가 되길 갈망합니다. 한편 이정은 더 이상의 반응은 무의미하다는 듯 윽박지르고 때려대는 엄마를 무심히 외면하려 하고, 그 웅크린 모습은 집밖에서도 이어집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트에 간 모녀가 또 한바탕 다툰 가운데, 수경이 탄 차가 차 앞에 선 이정을 치는 일이 발생하면서 곪아있던 갈등은 터지고 맙니다. 수경은 차가 급발진해 그렇다면서 자동차 회사에 소송을 걸겠다고 하는데, 이정은 수경이 고의로 그런 거라고 확신합니다. 급기야 재판에서 이정은 수경의 주장에 반박하는 증인으로 나서 그녀가 평소에 '죽여버린다'는 말을 밥먹듯이 했다고 증언하기까지 합니다. 수경이 그저 사과만 제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이정은 그동안 꾹 참고 미뤄왔던, 그러나 그만큼 간절히 원해왔던 엄마의 마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수경은 그런 이정이 갈수록 괘씸할 뿐이고, 엄마는 지금도 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갈등 속의 모녀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보여주는, 혈연으로 묶인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갈등을 매듭짓기 위해 흘러가지 않습니다. TV 속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서 고민 당사자들을 서둘러 화해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영화 속 수경과 이정은 억지로 봉합하는 것조차 어림없어 보이는, 파국으로 가는 게 훨씬 가까워 보이는 관계입니다. 수경은 이정으로 인해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했을 삶을 빼앗긴 채 20여년 간 원치 않은 고생을 해왔으므로, 지금은 그렇게 유예해 온 자신의 삶을 그저 누리고 있을 뿐이며 여태껏 쏟아 온 딸을 향한 사랑은 보상 받아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창 보상 받아야 할 시기에 아직도 얹혀 살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이정의 모습이 수경은 성에 찰 리가 없습니다. 반면 이정은 수경이 줬다고 생각하는 그 사랑의 최소한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기에 그런 엄마를 향한 보답 같은 건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된 것에 대해 머리가 큰 지금에라도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콧방귀도 안뀌는 수경이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서로를 향해 그저 증오와 화만 남은 것 같은,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게 어색하지 않은 이 관계는 다소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이지만, 이 이야기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극이 아닌 피부로 와닿을 듯한 리얼리티극으로 다가오는 것은 조금 공격적인 방식이긴 해도 우리 모두가 알면서도 묵인하곤 하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쓰라린 일면을 예리하게 파고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경과 이정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집에서 같이 산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남이었다면 애저녁에 끊었겠지만 가족이기에 그러지 못하는, 잡아먹을 듯이 싸우기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같은 집에 살며 같은 속옷을 나눠 입는 관계는 이미 각자의 뿌리가 서로에게 복잡하게 얽혀 정리하기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가장 최소한의 힘을 들이고도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겐 서로가 가장 무서운 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가장 기댈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누리며 지난 고통을 해소하고 싶지만, 바깥에서 이뤄지는 관계의 품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마치 감정 쓰레기통처럼 자신에게 마음 속 응어리를 토로하는 그들을 외부의 사람들은 선뜻 이해할 수 없고, 가족 관계를 끊고 나와 아무렇지 않은 듯 바깥에서 관계를 쌓아 가려는 그들을 외부의 사람들은 마냥 곱게 보지만도 않습니다. 결국 어디에서도 해소하지 못하는 두터운 감정의 생채기는 서로를 향할 때에야 비로소 뱉어내기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폭주하는 한편 답답할 수 밖에 없는, 이 시한폭탄 같은 관계의 최전선을 영화는 2시간 20분에 달하는 시간동안 내내 줄타기하면서도, 섣부른 봉합으로도 무책임한 파국으로도 보내지 못하는 이 관계의 끝을 향해 신중하게 걸어나갑니다. 그리고 어쩌면 제대로 깨어져야만 비로소 지속될 수 있는, 멀어져도 끊어지지 못하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죠.
격랑에 휩싸인 혈연 관계의 이야기가 휘몰아치면서도 마음을 건드리는 건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폭발적인 연기 덕분입니다. 김세인 감독은 자극적인 묘사나 대사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두 주인공 사이에 감도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그 여파로 각자가 생활에서 겪는 방황과 혼란에 세심하게 접근하고 그 속의 초상을 세세하게 그려냅니다. 힘과 섬세함을 겸비한 감독의 연출력 안에서 엄마 수경 역의 양말복 배우와 딸 이정 역의 임지호 배우의 연기는 펄펄 살아있습니다. 양말복 배우는 표출하는 욕망 너머에 여자로서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절박함이 담긴 수경의 내면을, 임지호 배우는 마음 속에 켜켜이 쌓인 분노와 설움을 토해내고 싶어도 학습된 무기력으로 그것조차 서툰 이정의 내면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두 배우는 온전히 편을 들 수 없는 두 인물을 적어도 '저런 사람도 있겠구나' 납득시키게 하며 굴곡진 캐릭터에 설득력을 불어넣습니다. 여기에 이정의 직장동료인 문소희 역의 정보람 배우, 수경의 남자친구인 종열 역의 양흥주 배우가 뚜렷한 개성을 지닌 두 주연배우들과 조화를 이루는 사실감 있는 연기로 두 모녀를 둘러싼 세계의 복잡한 공기가 그려지는 데 일조합니다.
영화에서 두 모녀가 내내 끓어오르던 증오와 분노를 그나마 가라앉히고 가장 진솔하게 서로에게 각자의 마음을 토로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전이 된 한밤 중의 집안, 서로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일어납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남아있는 모녀의 사진 역시 눈앞이 깜깜한 잠결에 찰나의 플래시에 힘입어 찍은 것이죠. 내내 편하게 볼 수 없으면서도 내내 가족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하다가 불현듯 다가오는 이 고요의 시간 앞에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홀로 서고픈 마음과 기댈 수 밖에 없는 본능 사이에서 항상 망설이는 삶의 얄궂음을 느끼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