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전편의 대성공으로 속편 제작은 당연히 일찌감치 확정되었었지만 타이틀롤을 연기했던 채드윅 보스만의 사망으로 인해 속편의 향방이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지 많은 팬들의 관심과 걱정이 동시에 집중되어 온 가운데, 드디어 선보이게 된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대단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영화 속 히어로이자 영화 밖 배우를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한편, 상실의 여파를 마주하고 극복하는 과정 자체를 주요한 서사로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설득력 있게 그려냅니다. 애도의 정서로 인해 그 어떤 MCU 영화들보다도 진중한 가운데에서도, 그 정서를 히어로물로서의 정체성과 원활히 이어가는 영화는 뜻하지 않은 슬픔과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영웅과 더 단단해지는 민족의 서사로 와칸다의 연대기를 다지는 데 성공합니다.
와칸다의 왕, '블랙 팬서' 티찰라(채드윅 보스만)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와칸다는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티찰라의 동생 슈리(레티티아 라이트)는 오빠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죄책감을 연구에 몰두하며 외면하려 하고, 왕대비였던 라몬다(안젤라 바셋)는 아들을 잃고 슬퍼할 새도 없이 왕의 자리에 올라 와칸다를 방어해야만 합니다. 바깥의 열강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비브라늄을 공유하라는 외교적 요구를 지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와칸다의 비브라늄 기지에 침입하거나 와칸다 밖에서 비브라늄을 탐색하는 등 갖가지 압박을 가해 옵니다. 아마도 왕이 세상을 떠난 지금의 와칸다가 흔들어서 비브라늄을 얻어내기에 더없이 좋은 상태라고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이런 혼란은 결국 뜻하지 않게 전혀 새로운 세력을 자극하게 되니, 바로 물 속에서 수백년 간 고도의 문명을 구축해 온 탈로칸이 그들입니다. 와칸다가 세상에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자신들의 안위까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고 주정하는 탈로칸의 지도자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는 와칸다를 향하여 자신들과 함께 외세에 맞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외세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적이 될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큰데 슈리와 라몬다 여왕, 나키아(루피타 뇽)와 오코예(다나이 구리라)까지 와칸다의 전사들은 어떻게 와칸다를 지킬 수 있을까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현실 속 배우 채드윅 보스만의 죽음을 다른 배우나 CG가 그가 연기했던 티찰라를 대신 맡는 것이 아닌 티찰라 역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갈무리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자연히 티찰라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티찰라는 와칸다를 이끌어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였고 어벤져스의 일원으로서 세계를 구하는 주요한 히어로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결코 가벼이 다뤄질 수 밖에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영화는 그를 위한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싹을 틔운, '상실 앞에서 어떻게 맞설 것인가'라는 화두가 영화를 내내 관통합니다. 혼란에 휩싸인 나라를 어떻게 구할 것이며, 슬픔에 빠진 일족은 어떻게 다시 일어설 것이며, 리더의 빈 자리를 어떻게 채워 새로운 적에 맞설 것인가와 같은 많은 질문들이 티찰라가 떠난 와칸다에 남습니다. 영화는 페이스를 굳이 빠르게 가져가지 않으면서, 침착하게 슬픔을 추스르고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강구하며 걸음을 내딛습니다. 티찰라의 빈 자리를 남은 사람들이 온전히 메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고통스럽지만 자인하면서 말이죠. 익히 알려진 유력 후계자인 슈리도 명민한 천재 과학도이지만 전편에서 와칸다에겐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슈리가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하루아침에 오빠의 자리를 대신하며 그만큼의 영웅으로 거듭나기 쉽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떠난 이는 한 사람이지만 그 한 사람이 남긴 족적은 한 민족과 국가 이상의 크기이며, 그 떠남의 슬픔은 남겨진 모든 이들의 몫이기에, 누구 한 명이 온전히 그 슬픔을 감당하기보다 남아 있는 모든 이들이 서로에게 슬픔을 다독이는 손길을 보탭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상실의 극복'은 개인이 풀어야 할 과제를 넘어 국가와 민족, 그 지도가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구심점이 될 지도자이자 히어로가 아예 떠나고 만 상황에서, 영화는 어떤 강력한 악보다는 또 다른 세력과의 대결을 택합니다. 상대가 악이라면 그를 쳐부순다는 심플한 답을 낼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면 답을 내는 과정이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리더의 현명한 결단이 필요한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비로소 다시 일어설 와칸다의 힘과 지도자가 될 이의 자질을 검증할 수 있겠죠. 네이머는 '빌런'이라기보다는 주인공의 신념에 맞서는 위치에 선 '안타고니스트'라고 칭해야 할 것인데, 그 이유는 그에게도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 백성들에게 그는 존경해마지 않는 위대한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침략의 역사 위에서 쓰여진 개인의 경험과 백성을 향한 애착에서 기반한 네이머의 도발은 위협적이면서도 다루기에 조심스럽습니다.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과 또 다른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얽혀 있는 와칸다와 탈로칸의 대립은, 예기치 못한 상실 앞에 고통스러워 하는 와칸다의 다음 과제인 '상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이 극복의 과정은 곧 자원과 국가와 국민을 지키려는 영웅의 탄생으로 귀결되고, 이렇게 떠난 이에 대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영웅이 탄생하거나 성장해 활약을 펼쳐야 하는 MCU의 또 다른 영웅 서사로 승화하는 결과에 이릅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티찰라의 부재로 인한 슬픔과 혼란, 고뇌와 탐색의 시간이 적잖다 보니 드라마의 비중이 높지만, 그 과정을 거쳐 각성과 성장에 이르는 후반부에 비로소 액션이 휘몰아치며 새롭게 탄생하는 영웅, 더욱 굳건해지는 민족의 서사를 만들어 갑니다.
전편에서와 완전히 다른 위상에 서게 되다 보니 슈리가 과연 이 거대한 이야기를 앞장서 이끌 수 있을까 우려가 되었는데, 영화는 원톱 체제보다는 앙상블 체제를 택함으로써 슈리의 성장과 그 외 인물들의 서포트를 골고루 힘있게 조명합니다. 슈리 역의 레티티아 라이트는 커다란 상실감 속에서 끊임없는 고뇌 끝에 의젓하게 성장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연기합니다. 티찰라의 공백을 완전히 메우기에는 아직 부족한 인물이지만, 그 부족함을 모르지 않고 의연하게 나아가는 모습을 기특하게 그려냅니다. 나키아 역의 루피타 뇽, 오코예 역의 다나이 구리라 등 와칸다의 주요 병력을 이루는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의 슬픔을 위무하며 전열을 재정비하고 와칸다를 지키기 위해 맞서는 강인한 연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아들을 잃은 슬픔을 딛고 끝까지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지키려는 라몬다 여왕 역의 안젤라 바셋이 보여준 카리스마도 대단했고요. 한편 이번 편에서 와칸다를 위협하는 핵심 인물인 네이머는 전편의 킬몽거에 이어 또 한번 와칸다를 일어서게 하는 멋진 맞수 역할을 합니다. 이 캐릭터를 연기한 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는 단호한 결단력부터 부드러운 통치력, 육해공을 가르는 물리적 능력까지 오랜 역사를 거치며 구축되어 온 리더의 복합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초면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극중 히어로의 죽음이자 실제 배우의 죽음을 겪은 끝에 나온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게 주어진 과제는 꽤 두터웠습니다. 떠나간 영웅에게 충분한 애도를 표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영화가 떠난 이를 위한 애도에만 머물러선 안되고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켜야 했죠. 이 두 서사를 모두 다루다 보니 러닝타임이 꽤 길고 묵직한 호흡 속에서 느낄 쾌감이 슈퍼히어로물에 일반적으로 기대할 만큼은 아닐 수 있지만, 그렇게 끝내 다시 일어서 야성으로 가득찬 함성을 외치는 와칸다와 마주할 때, 그리고 한결 성장한 채로 더 당당하게 떠난 이를 그리워할 수 있게 된 와칸다 사람들과 마주할 떄 영화는 비로소 진한 울림을 남깁니다. 애도 속에서 태어나는 영웅의 불꽃을, 슬픔 속에서 굳건해지는 사람들의 뿌리를 느끼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