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
20년보다 더 오래전 존재했던 한국 문화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인간적이고 따뜻했던 것 같다.
1.
현관문을 다 열어 놓고 지내던 복도식 아파트.
복도 몇 바퀴를 돌아도 모두가 귀여워하고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밖에서 놀다가 돌아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으면,
엄마 오실 때까지 집에 있으라며 들어오라고 하시던 옆집 아주머니.
배고플까 봐 라면을 끓여주시거나 짜장밥을 맛있게 먹고 있으면,
어느새 시장 갔다가 오신 엄마가 지나가는 걸 보고 나는 외친다.
“엄마~ 내 요깄다.”
2.
다세대 주택이 모여있던 우리 동네에는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 가자마자 책가방을 벗어놓고 골목으로 모인다.
삼삼오오 모인 우리는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어제는 축구, 오늘은 야구.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라 글러브며 배트며 부족하지만,
모인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넉넉하게 할 수 있다.
혹시 글러브가 부족하면 손으로 대신하면 되니까 문제 되지 않는다.
한참을 놀다 보면 여기저기서 엄마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OO아, 밥 무라.”
우리의 야구경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3.
“OO아. 일로 와바라.”
“네?”
“이거 옆집이랑 윗집에 좀 갖다 드리라.”
손이 크셔서 겉절이를 많이 하신 어머니는 이웃집에도 나눠주려고 그릇에 담아서 주신다.
그렇게 이웃집에 가면 김치를 덜어내시고 거기에 콩나물 무침이며 시금치 무침이며 주신다.
저녁 반찬으로 김치를 만들었는데, 갑자기 반찬이 늘었다.
밥 두 공기를 뚝딱 먹는다.
4.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특이하게 그린벨트 지역에 있었다.
등교를 하거나 하교를 할 때 걸어서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시내버스에서 내려서 20분은 걸어서 가야 하니까.
스쿨버스를 타거나 마을버스를 타고 간다.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승용차 한 대가 선다.
아빠 차를 타고 가던 친구 덕분에 편하게 등교를 한다.
교문 앞에서 많은 승용차들이 서는데, 다들 친구들을 태우고 와서 함께 내린다.
언제부턴가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누구의 잘못은 아닌 거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때가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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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하!
당신만의 의미 있는 인생을 사세요.
유캔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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