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시간]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시술을 해보고 그래도 안된다면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정말 힘들게 집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고 방에 가자마자 쓰러졌습니다.
저를 본 동생이 깜짝 놀라 소리치며 제게 다가왔습니다.
“행님아, 와 그러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숨 쉬는 것도 힘겨웠습니다.
연이어 거친 숨을 몰아쉬는 저를 보며 동생은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TV에서 본 것이 생각났는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왔습니다.
마른 수건을 가져오더니,
물을 적신 후 그 작은 손으로 수건을 힘껏 짰습니다.
그 당시 동생은 7살이었습니다.
빠른 7살이라 1학년이었습니다.
큰 수건을 짜는 게 쉽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있는 힘껏 짠 수건을 접어서 제 머리에 얹어줬습니다.
몸도 닦아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고맙네요.
그러나 그때는 고마워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숨이 붙어있는 듯했습니다.
시장에 가셨던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아이고, 야가 와 이라노.
느그 형 와 이라노.”
어머니도 어머니가 처음 이셨으니까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그리고 그때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도 한참이 어리셨습니다.
인터넷이 없으니 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동생은 수건으로 계속 저를 닦아주었고,
어머니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십니다.
여기까지가 그날에 대한 제 마지막 기억입니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땐,
병실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더 있다가 퇴원한 것만 기억이 납니다.
퇴원 후 어느 날 어머니께 세세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천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론 할아버지와 함께 살 때,
작은방에 어머니, 아버지, 나 이렇게 셋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방 안에서 담배를 피시는 바람에 그런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런 것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을 때라 이해합니다.
천식을 가지고 있는 제가 뜻밖의 가출을 하면서 감기가 심하게 걸렸고,
폐에 바람이 많이 차서 숨 쉴 공간이 줄었다고 합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폐의 90%는 바람이 차 있었다고 합니다.
남은 10%로 호흡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폐 확장을 위한 약물 투여를 했는데,
여러 번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시도를 앞두고 의사 선생님이 어머니께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드리기가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시술을 해보고 그래도 안된다면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계속 기도를 하셨답니다.
자식이 생사를 오고 가는데 그 어떤 부모가 가만히 있으시겠습니까.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의 기도가 통했는지,
저는 기적적으로 폐 확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고비를 겨우 넘기고 저는 살아났습니다.
어쩌면 저는 지금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뒤로 천식의 후유증은 꽤나 오래갔습니다.
겨울만 되면 쌕쌕거리며 호흡이 가빠지고 힘들었습니다.
찬공기 때문에 산소 밀도가 떨어지니 호흡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한참을 겨울에는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겨울에는 운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군대에 가서 많이 좋아졌습니다.
처음 군대 갈 때는 겨울에 못 뛰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뛰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의 군대 속에서 천식은 극복이 되었습니다.
매일을 긴장 속에서 살다 보니, 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 한계를 제가 설정해 놓고 도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겨울엔 천식 때문에 쌕쌕거리니 운동을 못할 거라고 말입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자.라고 말입니다.
제 한계를 극복하고 나니, 예전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오늘 기준으로 매일 5km를 코호흡만으로 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스토리를 말하지 않았다면,
어릴 때 천식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이라고는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긴 후,
스스로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나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계를 정하지 말고 깨부수고 나아가봅시다.
그럼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