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가도라는 노래를 아는가. 애니메이션 <쾌걸 근육맨 2세>의 그 주제가 말이다. 시원한 고음으로 없던 도전심도 만들어내는 연금술 같은 그 멜로디. 몇 초간의 전주만 들어도 이두근과 삼두근이 펌핑되는거 같은 그 전율적인 음율. 옆집이 그 노래를 이제 6번째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이웃이 계속 ‘한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데 무심한 듯 듣고만 있는거 같아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의 올라가지 않는 고음을 향한 애처로운 구애는 ‘한 번 더 나에게 질풍같은’ 까지는 버티지만, ‘용기를’에서 무너지고 만다. 하필은 ‘용기’라는 단어에서 무너지다니, 아이러니하다. 마음 같아서는 벽에 대고 “화이팅!’이라고 외치고 싶지만, 나에겐 그 ‘질풍같은 용기’가 없어서 조용히 누워서 고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는 시원하게 올라가길.
“한번 더~ 나에게~ 질풍 가아튼 요홍기르흐으으…”
이번에도 실패. 왠지 내가 다 아쉽다. 이웃이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그 용기를 문 앞에 두고 오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옆집은 쉽게 포기 하지 않았기에.
두둔 둔 둔 둔. 두둔 둔 둔 둔.
“한 번 더~ 나에게~”
갑자기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까지 연습을 하는 것일까. 전국노래자랑에 나갈건가? 오늘 노래방 약속이 있나? 밴드 동아리에서 그 곡을 하기로 했나? 의도, 상황, 목적, 심지어 사람 마저도 모르는데 응원을 하고 있는 나도 막상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응원은 누구에게 하게 되는 것일까? 내가 소속된 단체, 내가 아는 사람, 나의 지분이 있는 무언가에게만 하는 것인가?
난 진심이 보이는 것들을 응원하게 되는 것 같다. 다들 스포츠에서 지고 있는 팀을 응원하기 쉬운 이유는 그만큼 절실함이 더욱 더 잘 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되는거 같다. 그것이 대학원 졸업이든, 사업이든, 운동이든, 심지어 ‘질풍가도’의 고음을 성공 시키는 것이든.
어느 순간 옆 집에서 노래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고음을 내지 못 했는데 왜 멈췄지? 설마 계속 용기를 달라고 애원하던 그 목소리가 포기 한 것인가? 안 돼! 한번 더 용기를 내 봐! 벽 하나 너머로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나 침묵은 완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옆 집의 ‘질풍가도’ 도전은 없던 일이 되었다.
자취방 안이 잠잠해지니 외면하고 있었던 해야 할 일들이 날 지배하기 시작한다. 읽어야 할 논문들, 써야할 나의 논문. 논문이란 참 너무 너무하게 너무하다. 아휴 이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어. 논문은 언제 다 써. 대학원 졸업은 가능하긴 한건가.. 조용히 혼잣말로 툴툴대며 키보드를 두드리다보니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