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씨는 어떻게 하실건가요?”
대학원에서 3년 반째 썩고 있는 요즘이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에서 학교를, 또 대학원은 처음이었기에 학기 마다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하는 나날들이었다. 언어를 극복하니 철학을 극복해야 했고, 철학을 가까스로 조금 이해하니 미학을 이해해야 했다. 그것 마저 조금 알거 같다 싶으니 결국 졸업 과정을 위해 면담 때 교수님을 이해 해야 하는 난관에 부딫혔다.
“그러게요 교수님. 제가 최근에 배운 사자성어 중에 진퇴양난이 있는데… ”
교수님과 나는 아주 짧은 복식 웃음을 나누었다. 헛헛헛.
“이제 학기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의도치 않게 배수진을 치고야 말았네요 교수님.”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시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씁쓸한 맛의 녹차를 끓여주셨다. 무슨 말씀을 해주실까. 위로와 공감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졸업이란 명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서 미래에 대한 확실한 한 마디 만큼은 간절했다. 그것이 긍정의 확신이든 부정의 확신이든.
“임진왜란 때였어요. 조선이 부산까지 밀렸었죠. 일본은 자기네들이 바다에 강하다고 생각해서 해군을 믿고 있었어요. 그 한국, 아니 조선은 육지에 강할 것이다~ 막 이러면서.”
역시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비유를 좋아한다. 지금 내 상황도 비슷하다. 학생 신분을 유지 할 수 있는 최대 학기인 8학기 직전까지 왔다. 비유적으로 부산까지 밀린 나, 전세를 뒤집어서 졸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 어떤,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일단 음, 그 뭐 한 장군이 있었어요. 정말 고지에 유리한 진지를 점령해서 적군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다 포기 했어요. 우리는 배수진을 쳐야 한다고. 그래서 그 위치를 다 포기하고 해변가로 굳이 갔어요. 바다를 등지고 다들 죽기 살기로 싸우라고. 그래서 다들 죽었잖아.”
아. 이번 학기에 내가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그냥 죽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 남은 한 학기까지 페이스 조절을 하라는 말씀이시구나. 그래. 너무 급하게 생각하는게 안 좋을 수도 있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아니었으면 진짜. 이순신이 진짜 대단한 장군이에요. 전투에 다 이겼어요. 그런 장군도 없어요. 어떻게 다 이겨. 물론 마지막에 죽긴 했는데, 죽어서 이긴것도 있는거 같아요.”
그렇다. 난 이순신 같은 학생이 아니다. 난 내 학술적 죽음을 적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때 문득 이 모든 것이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어쩌면 그냥 지금 임진왜란 이야기를 하시는게 재밌으신 것 뿐일 수도.
교수님이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시길래 난 내 앞에 있는 녹차를 홀짝 마셨다. 사실 녹차를 마시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교수님의 역사 강의 폭주에 구두점을 찍고 싶어서였다. 녹차 홀짝, 시선은 테이블 위에 고정. 그렇게 비언어적으로 지쳤다는 시그널을 보내자 교수님도 토크를 마무리했다.
“아니 그냥 배수진 이야기가 나와서. 음.”
내 손목시계를 힐끗 봤다. 나에게 주어진 면담 시간이 벌써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졸업과 미래가 단 1%도 선명해지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이제 저 어떡해요 교수님. 저 지금 진퇴양난이고 배수진을 쳤다고 그랬잖아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교수님이 무서운걸 어떡해.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다음 면담이 잡혀 있어서… 일단은.. 뭐 생각나시는거 있으시면 다시 면담 신청하세요, 에.”
교수님 방을 나오니 이제 정말 등 뒤에 바다 밖에 없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정면돌파만이 답이다. 이번 학기에 난 모든 힘을 다해 졸업을 향해 갈거다. 그리고 졸업을 하면 그 기운으로 취업도 할거다. 화이팅!
음..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다. 문득 배수진을 친 사람들은 수영을 할 줄 몰랐나 하는 의문이 든다. 싸우다가 아니다 싶으면 어떡해서든 도망치는것도 방법이다 싶다. 배수진의 진짜 함정은 마치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답이 하나 밖에 없게끔 생각하도록 하는 가스라이팅 수법일지도 모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는데, 배수진이라고 다를까.
방금 재밌는 채용공고를 봤다. 실패한 논문 집필 과정으로 다져놓은 한국어 실력을 자소서에 발휘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