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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니 Apr 22. 2021

당신의 남편도 미안권법을 쓰나요?

이왕이면 다툼은 짧고 쿨하게

 연애시절, 그에게는 대단한 특기가 있었다. 며칠 전에 갈등이 있었던 일을 나는 이미 다 까먹었는데, 그는 다시 얘기를 꺼내며 재차 사과했다. 보통은 남자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무엇이 잘못됐는지 생각하지 않고 "미안해"하면 여자가 "뭐가 미안한데?"하면서 다툼이 커지기 마련인데, 남편은 신기하게도 본인이 잘못한 일을 다시 끄집어냈다. 단순히 같은 일을 여러 번 사과하는 것 보다 더 신기했던 것은 며칠동안이나 우리 사이에 있었던 갈등의 원인에 대해 고민했다는거다. 이 사람은 이렇게나 우리 사이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 되돌아보고 발전하게 만드는구나 감동스러웠다. 그때만 해도 내가 원석을 발견한 줄 알았다.


 그랬던 그가 결혼을 하고 미안권법이 특기인 '미안봇'이 되었다. 잘못한 일에야 당연히 미안하다고 해야하지만, 문제는 별로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미안-'이라고 답한다는 것. 예를들면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연락이 없을 때 "다음부터는 도착했을 때 연락해줘" 라고 얘기하면 돌아오는 답은 '미안-', "어제 왜 그렇게 늦게잤어? 일찍 좀 자지~"라고 대화를 시도해도 그의 대답은 늘 '미안-'으로 통일이다. 나는 미안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은게 아니라 전후 사정을 듣고 싶은데 '미안-'이라고 해버리면 더이상 물을게 없어진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남편을 사사건건 괴롭혀서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미안하다고 하는걸까? 나의 대화습관과 행동을 되짚어보며 반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미안함의 깊이가 의심스러워졌다. 며칠을 고민하고 하나하나 설명하던 연애시절과 지금의 '미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의 '미안-'에는 '아'발음을 길게 뺀 일정한 억양이 있다. 짜증은 전혀 섞이지 않았고, 꽤나 발랄한 톤이라 듣고 나면 왠지 기분이 나쁘다. 그 때문에 나는 남편이 진심을 담아 사과한다기 보다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미안권법을 쓰는 거라고 확신했다. 지난 밤에도 혼자 와인을 마시는 남편에게 "말도 안하고 혼자 와인을 마시는거야?"라고 물었는데, 이쯤되면 그의 답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자기도 같이 마실래?'라든지, '오늘은 와인이 좀 마시고 싶네'라든지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보기는 차고 넘친다. 왠지 소통을 차단당해 버린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은데, 명랑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하니 화를 낼 수도 없다.


 질문을 던졌을 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꽤나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데, 유부남이 된 그는 나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에너지를 쓰는 대신 빠르게 사과하는 쪽을 선택한 모양이다. 그래서 미안권법이 유부남들 사이에 통용이라도 되는 걸까? 얼마 전에 본인보다 한참 위의 선배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남편이 말하길, 선배가 아내한테 무조건 잘하라고 했단다. 나의 추측으로는 그 선배로부터 미안권법을 전수받은게 분명하다. 혀가 꼬부라진 선배가 "와이프가 뭐라고 하면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라고 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글을 보는 남편분들이 계시다면 오늘만은 제발 '미안' 말고 아내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에너지를 써보시라 당부하고 싶다.


남편과 함께한 통영 여행. 이곳에서도 그는 꽤나 많은 '미안-'을 외쳤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꼭 사과해야할 일에만 미안하다고 말한다. 남편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거나, 내 기분만 생각하고 이기적이게 행동을 했다거나, 그의 의도를 곡해해서 다짜고짜 화를 냈다거나 했을 때 말이다. 더군다나 남편은 '미안' 두 글자로는 쉽게 화가 풀리지 않는 사람이라서 내가 3-4번은 사과를 하고 전후 사정을 충분히 설명한 후 몇 시간쯤 지나서야 기분이 풀린다. 생각해보니 왠지 억울하다. 나와 달리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미안-' 두 글자로 모든걸 해결하고 있는게 아닌가? 왜 그의 사과는 이토록 단순한데, 나의 사과는 그토록 어려운 걸까.


 갈등이 생겼을 때, 우리가 헤어질 정도의 큰 일이 아니라면 최대한 빨리 해결하자는게 내 지론이다. 때문에 나는 늘 빠르게 상황을 종료 시키려고 그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런데 남편의 '미안-'은 아예 다툼이 생기기 전에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목적은 같다. 다투지 않고 다정하게 사는 것. 그것을 위해 나는 대화를 원하고 남편은 대화를 피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는 거다. 이제 그만 서로의 다름보다 우리가 같은 목표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음을 눈여겨 볼 때가 됐다.


 인생은 짧고, 사랑할 시간은 점점 없어진다. 이왕이면 다툼은 짧고 쿨하게 끝내자. 대신, '미안-'말고 다른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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