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일 우리 뭐할까?" 주말을 앞둔 밤,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홍대로 떡볶이 먹으러 갈래?" 그가 제안했다. 떡볶이에 진심인 우리 부부는 먼곳까지 떡볶이 맛집을 찾아 다니는데, 홍대에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 집이 있다. "좋아, 근데 4시에 일정이 있는데 그때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내가 물었고, 그는 당연하다며 걱정하지 말고 가자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일 떡볶이를 먹으러 간다고 생각하고 잠에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점심 때가 되자 그는 '우리 점심 뭐 먹을까?' 묻는다. 이 상황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메멘토(순간 기억 상실증)일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또 기대했다가 '아 그건 약속이 아니었구나...' 실망한다. 그게 약속이 아니었으면 뭐였을까? 우리 부부의 경우, 어디부터가 약속이고 어디까지는 약속이 아닌지 아직 그 기준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가 꼭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지 않았다고 해도 함께 무언가를 하기로 정했다면 그것이 약속이고 우리의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편의 경우는 다르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그는 "내일부터 퇴근하고 20층까지 계단을 3번씩 오를거야"라고 말하고 단 하루도 하지 않는다. 그럴거면 말을 안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본인 입으로 말해놓고 지키지 않을까? 내 입으로 뱉은 말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런 남편이 참 신기하다. 누군가와 밥 한번 먹자 하면 꼭 한 두달 내 밥을 먹는 사람이 나이고, 동일 인물과 수차례 밥 한번 먹자 하고도 인사치례로 넘기는 사람이 남편이다.
나는 꼭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려고 노력함에도 늘 내가 한말을 지키지 못 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친구들과 4시로 약속 시간을 정했는데, 4시 10분이 되어버리면 내가 약속시간을 어긴 것이 민망하고 부끄럽다. 지인과의 약속 뿐만이 아니다. 병원이나 미용실 예약도 반드시 예약한 시간보다 최소 5분 전에는 도착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무렵에 아빠에게 집에 5시까지 들어오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10분 정도 늦은 나에게 현관 문에서부터 아빠는 "지금 몇시야?"라고 물으며 시계를 들이밀었다. 매순간 나를 '예쁜딸'이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하던 아빠의 다른 모습은 좀 충격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가 뱉은 말은 무조건 지켜야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덧붙여 나를 제외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며 살아가는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3번째 명절이 다가오고 있을 무렵, 시어머니는 이번 명절에는 다 같이 둘러앉아 만두를 만들자고 하셨다. 신혼초였다면 그 자리가 너무 어렵고 불편했겠지만, 이제 시댁 식구들과도 꽤 친해졌고 오랜만에 만두를 만드는게 재밌을 것 같았다. 친정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나는 송편이든 만두든 가족들이 모여앉아 음식을 만들어 본게 아주 오래 전 일이라 더 기대가 됐다. 어릴 때 엄마랑 만들었던 코끼리 만두 사진을 인터넷으로 찾아, 나는 이렇게 생긴 만두를 만들거라고 남편에게 보여주기까지하며 명절을 기다렸다. 명절 당일, 시댁에 도착하자 온 집안에서 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머님이 우리가 오기도 전에 명절 음식을 모두 해두신거다. 마음 편히 먹고만 가라는 배려에 정말 감사했다. 하지만 그날 하루종일 전을 부친 어머님은 '만두는 힘들어서 못하겠다' 하셨다. 그날 어머님에게서 그가 보였다.
세상에서 나와 가장 닮을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결정한 결혼 이후, 우리가 다르다고 느낄 때마다 그것은 그와 나만의 다름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나의 가족의 다름인 경우가 많았다. 한 인간이 자신의 성장을 도운 가족과 함께, 아주 깊고 넓은 시간에 걸쳐 나에게 오는 결혼이라는 제도는 상대뿐만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신혼 초에는 다름을 이유로 아주 많이 다퉜고, 지금은 우리가 각자의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다른 문화와 가치관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다툼의 이유를 깨닫는 중이다. 그럼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나는 그의 부모와 나의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닌 우리 부부만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한다고 생각한다. 그와 여러 번 의논하고 부딪혀서라도 우리가 합의한 것들을 우리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다.
예전에는 자식을 낳으면 무조건 내 가치관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앞서 이야기한 약속의 문제에서도 가볍더라도 본인이 한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벼운 말들은 말 그대로 가볍게 넘기거나 쉽게 바꿀 수 있는 그가 훨씬 여유롭고 행복해보인다. 오히려 내가 한말을 지키려고 애쓰거나, 상대의 말에 매번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나와는 달리 늘 마음 편한건 남편 쪽이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옳다 틀리다 할 수는 없다. 내 아이는 마음이 편하고 행복한 아이였으면 좋겠으니까.
주말 저녁, 쓰레기가 가득찬 분리수거함을 보며 "여보 쓰레기 내다버리자!"하면 남편은 "내일 내가 버릴게." 한다. 내가 "여보 탄산수가 다 떨어졌어."하면 역시나 남편은 "내일 내가 퇴근하면서 사올게!"한다. 남편은 매 순간 확신에 차서 말하지만 나는 내일 퇴근 후 그가 쓰레기를 버리거나, 탄산수를 사올리가 절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이제는 그냥 "응, 그래"하고 만다. 그가 말하는 내일하면 안될까?의 의미는 내일 정말로 하겠다는 약속의 뜻이 아니라 지금은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결혼 3년차, 이제 그를 20% 정도 이해한것 같다.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