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vs 놀이
일과 놀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일은 해야 하는 것이고, 놀이는 그냥 하는 것이다. 일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고, 놀이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얼마 전 즐겨 보는 한국기행에선 바쁘게 하면 일이 되고, 천천히 하면 놀이가 된다고 했다.
소속 노무법인엔 ‘의견서 24시간 내 작성 원칙’이 있었다. 사회규범으로 해석되는 '소셜 놈(Social Norm)'과 같은 것이다. 오랜 기간 노무사들이 의견서 마감 압박을 받으면서 굳어진 관행으로 보였다.
수습노무사로서는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사 마감 생활을 해온 탓에 마감시간을 넘기는 것은 심리적으로 허용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해서라도 24시간을 지키려고 했다. 그렇게 작성된 의견서는 대표 노무사 손을 거치며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파란색 글씨로 수정되었고, 빨간색 줄과 함께 삭제되었다.
대표 노무사의 촉은 뛰어났다. 그는 의견서를 작성하면서 근거가 좀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은 예외 없이 콕 집어냈다. 매번 어떻게 그리 잘 집어내는지 신통방통할 정도였다. 대형 노무법인의 대표 노무사 자리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빡세기로 유명한 법인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상상 이상이었다. 일주일에 3~4개씩 의견서를 작성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훈련과정이겠거니 생각하고, 꾸역꾸역 마감을 지켰다. 하지만 완성도에 대한 만족도는 쉽게 높아지지 않았다. 시간에 쫓기니 여러 전제 조건이 달린 의견서가 만들어졌다.
자연스럽게 의견서 작성은 놀이에서 일로 바뀌었다.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첩첩산중에 빠져드는 느낌이었고, 보물찾기처럼 느껴지던 판례찾기도 시간에 쫓기면서 모래사장에서의 바늘찾기로 바뀌었다.
한 노무사는 국내 노무법인 중에 의견서 24시간 내 작성 원칙을 지키고 있는 곳은 둘밖에 없다고 했다. 24시간 내 의견서 제공이 가능하려면 많은 노무사가 필요하고, 중소형 법인들이 쉽게 따라하기 힘든 마케팅 포인트임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각종 자문과 컨설팅, 그리고 노동사건이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떨어지는 의견서 작성 지시는 소속 노무사로서는 죽을 맛이다. 특히 일이 익숙하지 않은 수습노무사에게는 극한 작업으로 느껴졌다. 대표 노무사는 의견서 작성 업무를 다수 맡기는 방식으로 수습노무사를 훈련시켰다.
그 때문일까. 힘들어 이틀만에 퇴사한 노무사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2주만에 퇴사하는 노무사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대상포진에 걸린 노무사도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잘 돼야 할 텐데"라는 흘러간 유행어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