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잔 줄 알았어 - 여동생의 한마디」
여동생이 내게 말했다. "어? 뭐야, 노숙잔 줄 알았어."
새벽.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큰길을 지나 더 어두워진 골목에 접어들자 눈으로 바뀐다.
검은 고양이가 담벼락 위에 있다. 황색 가로등이 고양이 머리 위에서 빛을 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검은 고양이가 곧 날쌔게 뛰어내린다. 서로 놀랐다. 아니 내가 더 놀랐는지도 모른다.
슬며시 눈 덮인 길바닥에 고양이 발자국이 찍힌다. 고양이의 초록색 눈이 뇌리에 남는다. 어딜 가나 잘 먹고 편안한 곳에서 눈 붙여야 할 텐데...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다. 내리는 눈에 고양이 발자국도 금세 사라진다.
화르르- 화르르- 눈, 흰 눈이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내린다. 이 눈 오는 길을 걷다 반가운 누군가를 만난다면 좋으련만.
눈이 내렸으면 했던 바람, 그 애틋한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어느 해부터인가는 가만히 마당에 서서는 하늘을 바라보다, 아, 눈이 오겠다, 생각하면 이내 눈이 내리곤 했었다. 내 몸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감지했었다. 특히 첫눈이 오길 잘 알아맞혔다.
열 살 정도 됐을 때 일이다. 기쁜 눈을 맞으며 어디든지 걸어갔었다. 그때의 기쁜 발걸음은 지금도 감회가 새롭다. 살던 곳이 고지 높은 시골이어서 큰길에서 작은 길로, 논두렁에서 밭고랑 길로 도랑도 건너고, 오솔길 걸어 산으로도 가고, 그러다 어느 해 겨울인가는 가장 친한 친구를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눈발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친구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도 그만큼 맑은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길에서 만나서 더 기분 좋았고, 신기했었다.
친구가 물었다.
"너 여기 왜 왔냐?"
"어, 눈 와서......"
"나도......"
우리는 같이 한참 걷다가 해 질 무렵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었다.
지금은 아무리 걸어봐도, 감흥이 없다. 눈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옷 위로 가득 쌓인다. 머리에 눌러쓸 모자도 없다. 나는 고스란히 눈사람이 되었다.
갓 성인을 넘긴 어느 겨울날 밤이었다. 오락실도박장에서 기백만 원을 잃고 나서, 집에 가던 길에 내리던 눈발이 그리도 거세더니만, 그날 짓눌린 가슴으로 맞았던 눈과 지금 내리는 눈을 맞는 기분이 비슷하다.
무척이나 많이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참나,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는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생의 실타래는 마구 뒤엉켰지만, 막상 손댈 것은 없다. 스러진 육신을 다시 채워 넣으려면 또다시 시간은 필요할 터인데.
그래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련다. 나는 지금 어린아이가 되어 눈을 맞으련다. 가슴이 울컥, 눈자위가 시큰해지는 지금 오, 고개 치켜들어 허공을 응시한다.
잠들고 싶다.
내리는 눈처럼 속도감 있게 살 순 없을까 하지만,
잠들고 싶다.
내리는 눈처럼 어영부영하지 않을 순 없을까 하지만,
잠들고 싶다.
아토피로 몸이 근질거리지만,
잠들고 싶다.
조금 전 봤던 검은 고양이에게 연민이 든다. 찾아서 보살펴주고 싶지만,
잠들고 싶다.
저 앞에서 오는 여동생이 보인다. 여동생은 친구들과 발랄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오고 있다. 아는 체하지 말아야겠다.
어제는 길에서 만난 내 동생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토피로 근질거리는 몸을 긁고 있을 때 저 앞으로 동생이 보였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동생은 나를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쳤다.
한창 인류를 위해 고행하던 시기였다. 이 때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늙었다. 얼굴에 난 점은 인류를 위해 떼어줬고, 현재는 없다. 고행의 표시가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있던 때.
"야, 나다. 오빠."
"어? 뭐야, 노숙잔 줄 알았어."
지금의 내 행색이 어제보다도 못하니, 지금 아는 체하면 동생이 난처해진다. 오빠의 존재가 친구들에게 부끄러워질 것이다.
유령처럼, 꿈처럼, 오늘도 내일도.
동생이 오늘 나를 알아봤다면, 내게 아는 척을 했을까?
잠들고 싶다.
눈 덮인 침묵 속에서, 모든 아픔을 내려놓고 잠들고 싶다.
하얀 눈의 품속에서, 모든 것을 용서받고 잠들고 싶다.
잠들고 싶다.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고 잠들고 싶다.
ㅡㅡㅡ
2006년 11월
김진 수필집 수록 예정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