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주방의 고수라고 해야겠지.
미팅이 시드니에 있어서 9시 20분엔 출발을 해야 한다. 정신없이 서둘러야 할 시간인데, 나는 이미 어제 절여둔 배추를 헹구고, 감자탕 고기의 핏물을 빼고, 조림용 연근은 씻어 식촛물에 담가두고, 깍두기용 무도 반듯하게 썰어두고 있었다. 동시에 아침 식사를 차리고, 도시락도 싸고 있다.
이건 뭐지?
요샌 몸이 먼저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 것 같다. 손이, 발이, 심지어 눈까지도 일을 나눠한다.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오호~ 이걸 다 해내고 있네 내가? 뭐 이런 느낌.
'이 정도면... 무림의 고수, 아니 주방의 고수라 해야 되는 거 아님?'
26년 차 주부의 내공이 조용히, 하지만 단단하게 쌓였나 보다. 남들 눈엔 평범해 보일지 몰라도, 나 혼자 아는 이 경지. 허둥대지도 않고, 순서도 자연스럽고, 도마 위 칼질 소리마저 음악처럼 들리는 이 순간. 내가 봐도 신기하다.
이민 와서 첨에 김치를 담그다가 ( 배추 8통을 하루 종일 걸려 씻고 절이고 무쳐서, 겨우 자정에 끝남) 과호흡이 와서 쓰러졌던 나, 육아도 요리도 살림도 너무 힘들고 어려워 주저앉아 울기도 했던 나...
그래, 그런 날들을 다 지나 여기까지 왔다.
부엌에서 닦아온 내 내공이다.
물기 뺀 김치와 깍두기를 무쳐 통에 담는 동안, 연근을 조렸다. 남편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외출준비를 하고 내려왔다.
당연한 듯, 아무렇지 않게,
재야의 고수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