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적는다.
내년 목표: 새 자취방 구하고 예쁘게 꾸미기
내 눈에 독기가 돌고 있을 것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쓴 게 아니고 잔뜩 골이 난 마음으로 적었다. 한동안 할머니가 약해 보여 마음이 쓰이고 든든한 룸메이트가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이어졌지만 점점 비위생적으로 변하는 부엌을 보면서 한숨이 늘어났다. 신문지는 식탁 위는 물론, 바닥으로 치면 싱크대 밑에서부터 다용도실 앞, 식탁 아래까지 주욱 깔려 있고, 언제 깔았는지 물이나 양념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다. 그렇게 쭈글쭈글 우는 종이는 입체적으로 올라와 걸을 때마다 발에 차이곤 했다. 그 위에는 비거나 채워진 냄비나 뚝배기들이 눌러앉았다. 요리를 하려면 이제 싱크에 바짝 붙어 서지도 못하게 되었고, 재료나 국물이 바닥에 떨어지면 바닥에 놓인 물건들 사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야 할 정도였다. 다용도실 안에도, 세탁기가 있는 뒷베란다에도 신문지가 깔렸다. 할머니가 바닥 청소를 안 하기 위해 까시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청소는 안 하는 것이었고, 신문지 모퉁이마다 먼지 덩어리가 뭉쳐 걸려 있기 일쑤였다. 답답해서 내가 청소를 하려 해도 신문지를 치우거나 싹 새롭게 갈지 않는 이상 티도 안 났다. 와중에 할머니는 신문지를 내버려 두라고만 하니 청소는 하는 의미가 없다시피 했다. 부엌에만 있으면 식사 준비하고 밥을 먹는 때만 해도 수십 번 이상 다른 집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거실이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다. 바닥에는 먼지가 굴러다니고, 거기에 커다란 카펫이 깔려 있는데 이 집에는 청소기가 없다.
요즘엔 할머니도 내 굳은 표정과 한숨을 의식하시는지 먼저 말을 안 거시고, 나도 굳이 먼저 대화를 시작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씩 조용한 큰 집 저쪽 방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든든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함께 사는 사람이 있어 든든한 건 사실이지만, 언제나 머릿속엔 나만의 자취방을 얻게 된다면 모든 걸 깔끔하게 배치하고 수납하고 싶다는 소망이 가득했다. 상상 속에서 어떻게 꾸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끝에 서랍 속 잡동사니의 배치까지 하나하나 구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친척 언니나 친구가 자취하는 방에 가서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집의 넓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집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지금 이 집에서 가장 깨끗한 구역은 내 방과 욕실이다. 이런 상태를 집 전체로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퇴근할 때 복도를 걷다 보면 맞은편 아파트의 거실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 매너 상 드러내놓고 쳐다보지는 않지만 스치듯 눈에 들어오는 깨끗한 거실, 바닥에 누워 TV를 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거실을 이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날이 추운데도 다용도실과 뒷베란다에 쌓여 있는 잡곡에서 쌀벌레가 나왔다. 깎아놓은 손톱처럼 가느다랗고 작은 나방이 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게 되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화랑곡나방이라고 하는 해충이었다. 다행히 냉장고 안에 넣어 둔 내 쌀은 괜찮았다.
“룸메이트가 엄청 늘어났어. 그것도 엄청 많이.”
빨대로 음료를 들이켠 뒤 체념투로 앞에 앉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어휴, 징그러워. 그 집에 계속 있을 거야?”
“아니!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
빨대로 음료를 휘휘 저었다.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야 말이지. 매일 인터넷으로 찾고 있어.”
“그 위치에 살다가 옮기려면 성에 차는 곳이 없겠는데.”
“맞아. 그게 문제야.”
멍하니 던진 시선 끝에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들어오던 할머니의 모습, 멍하니 앉아 힘없이 음식을 씹는 할머니의 굽은 등이 떠올랐다. 순간 목구멍 아래로 무언가가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 동안 나는 빨대를 입에 물고 줄곧 음료를 아주 조금씩 끊임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친구들한테 할머니와의 생활의 즐거움을 얘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사소한 것, 할머니가 먼저 배려해 주거나 정말 사소하게 신경 써주시던 것들은 말하지 않은 게 더 많았다. 친구들 머릿속에서 할머니는 위생관념이 없는 한 명의 노인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결국 아무 말을 말 걸 괜한 불평을 풀어냈다는 찝찝함만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늦은 저녁, 집에 들어가니 침침한 조명 하나만 켜진 거실과 부엌 사이를 할머니가 끄는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할머니는 눈치를 보듯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내 얼굴을 살폈다. 그러곤 땅바닥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밥 먹었니?”
“네. 할머니는 드셨어요?”
할머니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곤 TV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개운치 않아 뒤따라가 방문을 열었다.
“정말 드셨어요?”
어두운 방 안 TV의 오색 찬란한 빛의 변화 속에서 할머니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뭐라고 했니?”
“저녁 진지 정말 드셨냐고요.”
“먹었어. 왜?”
그제야 안심이 되어 작은 한숨이 나왔다.
“그냥요. 안녕히 주무세요.”
방문을 닫고 내 방으로 걸어가는 사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 할머니를 두고 이 집을 나간다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 한편 식탁 위에 펼쳐진 신문지들을 보니 다시금 답답함이 밀려 올라왔다.
‘대체 어쩌란 말이야!’
곧바로 허공에 외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