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by 진기유

식사 준비를 하러 부엌에 들어갔다. 몇 시간 전에 설거지를 한 후 말리려고 뒤집어 놓았던 반찬통 위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장갑이 걸쳐져 있다. 이걸로 몇 번째인지. 고무장갑을 말리려면 수전이나 상부장 아래 집게에 거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려도 할머니는 내가 설거지하고 뒤집어 둔 식기에 젖은 고무장갑을 걸쳐 놓는다. 뒤로 돌아 식탁을 보니 접시 위에 놓인 깎은 참외가 끈적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음식을 제대로 보관하지 않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음식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나에게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닌데 보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과일, 반찬, 밥 할 것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식탁 위에는 말라비틀어져 가는 음식이 놓여 있다. 랩으로 감싸기라도 하거나 아예 바로 버려버리는 것이 좋을 텐데, 저렇게 몇 시간 혹은 며칠을 방치하고는 상하거나 말랐다고 버리신다. 나는 처음 몇 번은 할머니가 방치한 음식에 덮개를 씌우거나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으며 설명을 해드렸지만 나아지지 않아 포기했다. 냉장고에 넣어드려도 결국 자리만 차지하다가 음식물 쓰레기로 전락해버리곤 했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함께 지낸 지 2년이 가까워 오자,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닥이 나 있었다. 한정적인 인간관계만 있기에, 할머니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와 요즘 보는 TV 이야기가 전부였다. 바깥 활동이 적다는 건 이런 단점이 있었다. 할머니와 생활 패턴 때문에 부딪히는 것에 더해, 점점 할머니의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져서 요즘엔 말 한마디 걸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이야기가 하고 싶으신지 할머니가 운을 뗐다. 이미 여러 번 들은 오래전 이야기였다. 조용조용 듣다 보니 이야기는 갑자기 할머니의 지인 김경 씨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엉뚱한 데에다 돈을 쓰느라 노년에 접어들었는데 모은 돈은 없고, 빚을 져서는 할머니 주소로 독촉장이 날아오게 되어 있고, 듣자 하니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일삼는 그 사람. 그 사람 이야기라면 한 마디도 더 듣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릇에 코 박듯이 하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도 할머니는 끈질기게 김경 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머리가 아파 와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냈다.

“할머니. 그 김경이라는 분이랑 그 딸이라는 사람 이야기 저한테 하지 말아 주세요. 주소 여기로 돌려놔서 맨날 고지서니 법규 위반 통지서 날아오게 하는 사람들 아니에요? 하루가 멀다 하고 대부업체에서 독촉인지 뭔지 우편물 오잖아요. 저 그런 사람들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는 풉 웃고는 “그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야.”라고 했다.

내가 정색을 하는 걸 본 할머니는 멋쩍은 웃음을 끝으로 더 이상 그 모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할머니의 몇 없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가 차단되었을 때 할머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내 정신을 흩트리는 그런 이야기는 돈을 받는대도 듣고 싶지 않았고, 그런 것이 싫으면 이 집에서 나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제 집값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아직도 망설이는 것은 아무리 요즘 서로 냉랭해졌다고 해도 할머니가 집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에 안도감과 친밀감을 갖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게 나를 말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내가 갑자기 이 집에서 나가면 할머니는 정적밖에 없는 집에 남겨질 것이다. 식탁에서도 홀로 식사하고, 집에 들어오면 고요하고, 하루하루가 어제와 저번 주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 다시 시작될 텐데,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건 내 오만일 뿐, 할머니는 어서 내가 나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만.


참자, 참자. 할머니도 나를 참고 있는 면이 있을 테니까 나도 참자.


그렇게 시간이 흘러 더위가 찾아왔다. 집 안 공기까지 후텁지근하니 위생이 더 신경 쓰이게 되었다. 부엌을 둘러보며 조금이라도 내가 치워보자는 결심을 했다. 조리대 아래 바닥에는 언제 떨어진 찌개 국물인지 모를 것이 말라 쭈글쭈글해진 신문지가 테두리에 먼지를 달고는 할머니의 냄비에 눌려 바닥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다용도실에는 곡물과 김치통과 종이쇼핑백이 한가득. 종류별로 분류해서 깔끔하게 정돈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허리를 굽혔다. 우선 신문지를 모조리 치우고 바닥을 닦고······. 바닥에 깔린 신문지를 들췄는데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그 아래 또 몇 겹의 신문지가 깔려 있었고, 거기엔 작년 11월 날짜가 적혀 있었다. 반년이 넘도록 이 바닥에서 젖어가며 치워지지 않고 그 위에 쌓이는 신문지 아래에 감춰져 있었다는 건가? 벌레를 본 듯 몸이 굳었다. 할머니가 부엌으로 걸어오다가 나를 보고는 “너는 왜 그러고 가만-히 있냐?”라며 내 행동이 사뭇 이상하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으려던 차에 할머니가 일격을 가했다.

“또 신문지 타령 하려고 하냐? 깨끗하대도 그래.”

나는 곧장 허리를 펴고 일어나 말했다.

“할머니, 이 신문 몇 월 자 신문인지 봐 보실래요?”

할머니는 움찔 놀라고는 눈썹을 추켜올리고 눈을 마주쳤다. 이 순간부터 강렬히 직감했다.

‘말해버렸네. 이제 나도 나를 못 말릴 것 같아.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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