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상추

by 진기유

퇴근길 빛깔과 냄새에 여름이 섞여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에 노을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여느 때처럼 낡고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밟고 그늘진 1층 현관홀로 들어와 낡고 좁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에 공기처럼 존재하던 주변의 환경이 날로 날로 생경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날 마음을 먹고, 그 마음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탓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등 뒤로 현관문을 닫는데 집안에 풀내음이 연하게 감돌고 있는 듯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니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포대자루만 한 검은 비닐봉지가 벌려져 있고 어마어마한 양의 상추가 신문지 위에 나와 있었다. 그 곁에 앉은 할머니는 상추를 한 장 한 장 들춰가며 어떠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상추의 양을 보고 지레 얕은 비명이 나왔다. 오래 보관하기 어려운 채소가 단 둘이 사는 집에 이렇게 많을 이유가 없었다.

“누가 줘가지고 받아 왔어. 뭘 이렇게 무식하게 많이 주는지.”

“주말 텃밭, 뭐 그런 걸로 키우셨대요?”

“그런가 봐.”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쳐다봤다. 할머니가 뭘 하시나 봤더니, 상추에서 달팽이를 떼어 옆에 있는 그릇에 옮겨 붙이고 있었다. 그릇에는 이미 열 마리 정도의 달팽이가 있었다.

“달팽이가 있어요?”

“응. 뭔 놈의 달팽이가 이렇게 많니? 떼어도 떼어도 끝이 없다.”

할머니는 더러운 것이라도 잡는 마냥 손끝을 길게 빼 간신히 등 껍데기를 잡고는, 끈끈한 달팽이를 상추에서 떼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할머니, 달팽이 무서워하세요?”

“징그럽잖아. 너는?”

“저는 귀여워요.”

“귀엽기는, 이런 게 뭐가.”

할머니는 입꼬리를 잔뜩 내리고 다시 달팽이 떼기에 집중했다. 할머니가 어린애처럼 달팽이를 징그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징그럽다면서도 책임감을 갖고 하나하나 떼는 모습이 뭐라 말할 수 없이 강하게 보호 본능을 건드렸다.

“달팽이 떼는 거 싫으시면 제가 손 씻고 와서 할게요. 내려놓고 쉬세요.”

“어이구, 언제는 방에 귀뚜라미 들어왔다고 잡아달라 난리였으면서.”

“귀뚜라미는 날개가 있고 달팽이는 없잖아요.”

“진짜 할 수 있겠어?”

오랜만에 나눈 대화 다운 대화였다. 아주 짧았지만. 그만큼 요즘 우리 둘 사이에는 대화가 메말라 있었다.



저녁에 달팽이 덕분에 대화를 나눈 것을 밤늦게 이불속에서 떠올려 보았다. 할머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달팽이를 떼내는 것을, 엄청난 속도로 상추를 검사하는 것을 신통방통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일부러 웃기려고 하시는 건가 싶을 정도로 눈썹을 구불구불 추켜올리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정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집에서 이사를 나갈 생각을 굳혀 놓았다. 아무리 할머니가 나의 편의를 신경 써주신다고 해도 역시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불편했다. 요즘 들어서는 할머니의 ‘할머니 같은’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거슬리면서 불만이 쌓였다. 할머니 같은 걸음걸이, 할머니 같은 표정, 할머니 같은 동작, 할머니 같은 목소리와 말투. 크고 걸걸한 목소리로 항상 말끝이 힘없이 축축 늘어지는 데다가 항상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말투로 길고 긴 통화를 하는 목소리. 왜 이제야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거슬리기 시작한 걸까. 누군가가 남녀 관계를 두고 말했다. ‘좋아서 죽고 못 살 때는 상대방 이에 낀 고춧가루를 빼줄 수도 있지만 싫어지면 그 꼴 보기 싫어서 헤어지자고 한다.’

마음이 먼저 돌아선 게 원인이라는 뜻이겠지. 나도 아마 위생 문제로 시작하여 할머니에게 마음이 돌아선 게 아닐까. 할머니를 싫어하고 싶지 않은데 좋고 싫음은 더 이상 의지로 제어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참에, 다시 정을 붙여보자고 되뇌었다. 그래도 안 되겠으면 할머니께 나가겠다고 말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견뎌 보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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