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어딘가에 들렀다 가는 날이 늘었다. 그 집을 생각하면 신문지와 쌀벌레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곳은 언젠가부터 일찍 일찍 들어가고 싶은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찾아서 내용을 훑어보려는 책이 네 권 있어 서점에 갔다. 장르가 다양하여 이 책장 저 책장으로 이동하며 서가를 살피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랑 자꾸 동선이 겹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뒤에서 따라오는데 말을 걸진 않는다. 네 번째 책을 찾아 꺼내다 말고 살짝 곁눈을 굴려 보니 역시나 이번에도 뒤쪽에 다가와 있었다. 용기를 내어 얼굴을 쳐다봤는데 놀랍게도 대학교 선배였다. 함께 수업을 들었을 땐 오빠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지냈던 사이다.
“맞네!”
선배는 밝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한참을 허리를 굽혀가며 웃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계속 따라오나 싶었어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야?”
농담조로 따져 묻는 선배. 2년 전 그대로였다.
“긴가민가해서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따라왔어. 나는 지금 휴학 중이고 이 근처에서 알바해. 토익책 사려고 왔는데 너 닮은 사람이 앞에 쓱 지나가는 거야.”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유쾌한 일이었다. 선배의 시점에서 놀라고 반가웠던 이야기를 들으니 그 단순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괜찮으면 저녁 같이 먹을래?”
선배의 제안에 일순 망설였지만 도서관 반납일이 가까워 오늘 중 다 읽으려고 작정한 책이 떠올랐다. 서로의 휴대폰에 번호가 남아있다는 걸 확인하고 곧바로 헤어졌다.
반가운 만남에 들뜬 것도 잠시, 지하철을 타고 집 쪽으로 이동한 뒤 내려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걷는데 비스듬히 앞서 걷던 할아버지가 야무지게 휙 넘겨 감는 목도리에 뺨을 맞았다. 가느다란 술이 치렁치렁 달린 목도리라 볼이 따끔하고 눈이 아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인파 속에 휩쓸리다가 그 할아버지랑 멀리 떨어졌다가도 다시 합류하게 되어 에스컬레이터를 양 옆으로 나란히 서서 타게 되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고 우리가 선 칸이 위로 솟아오르자마자 할아버지가 “어어!” 하며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며 반사적으로 내 팔짱을 꼈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앞만 보고 있던 나는 한 손으로 급히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손에 책이 들려 있어서 제대로 잡지 못했다. “어, 어!”하며 몸이 뒤로 슬로모션처럼 넘어가는데 다행이게도 조금 떨어져 뒤쪽에 서 있던 사람이 서둘러 올라와 할아버지와 내 등을 떠받치면서 짧은 소동이 끝났다. 할아버지는 에스컬레이터가 끝날 때까지 연신 나와 뒷사람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화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는데, 입에서는 무의식 중에 “괜찮으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할아버지는 괜찮다며, 제대로 안쪽으로 서 있지 않아서 그랬다고 했다. 나도 뒷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여러 번 하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렸다. 단순하게 끝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뒹굴어 떨어질 뻔했다. 일순간이었지만 생각보다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를 위험에 끌어들인 사람에게 화 난 와중에 괜찮냐는 말이 튀어나오다니, 할머니와 함께 살며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싶었다. 어르신들이 움직임이 둔할 때 본인만큼 그것이 답답하고 서글픈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들어가는 길에 집 앞 식당에 들렀다. 집에 가서 저녁을 차려 먹는 것보다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놓고 메뉴를 주문했다. 먼저 주문한 다른 손님들을 보니, 주방 쪽에서 음식을 내며 가져가라고 외치면 셀프로 가져다 먹는 시스템이었다. 노란빛이 감도는 아늑한 식당 불빛 아래에서 책을 펼쳤다. 내가 시킨 음식이 언제 나오나 귀를 쫑긋 세우면서 책의 글자를 좇아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조명이 책 읽기에 딱 좋은 기분 좋은 빛을 비춰주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책에 큰 그림자가 생기더니 내가 시켰던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아주머니가 미소를 지어주곤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깟 책 읽는 게 뭐 큰일이라고, 대단한 책을 읽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 뒤로 들어온 손님들도 모두 주방에서 외치면 직접 가서 음식을 가져왔다. 황송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집으로 걸어가며 퇴근 후 있었던 해프닝들을 되짚어 보았다. 묘한 만남들이 이어진 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평소와 다른 일탈감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오랜만에 활기차게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해볼까. 할머니께도 기분 좋은 이 느낌을 전할 수 있도록. 이름 모를 이들의, 도움 아닌 도움으로 할머니와 나 사이의 공기에서 조금이라도 탁한 것을 걷어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