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名不虛傳)
여러 SNS 중 내가 가장 많이 들여다보는 페이스북을 훑던 중 댓글에서 생소한 단어를 발견했다. ‘이생망’. 워낙 신조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통에 아재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검색을 해가며 배우고 있는데 이생망은 처음 봤다. 하지만 굳이 검색해보지 않아도 뜻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나도 자주 하던 말이니까.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 주변 사람들이 결혼은 언제 하냐고 물으면 이 말로 대답을 하곤 했는데, 아직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벌써부터 이번 생은 망했다고 말하는 건 비정상적인 시대에 대한 조소가 섞인 체념과도 같았다. ‘이제와 노력하면 뭐하나 어차피 망했는데’ 라고 생각하면 허무하지만 마음은 편하다. 더워 죽겠다, 추워 죽겠다 하는 것처럼 남발해서는 안 되는 말이긴 하지만 어쩌랴. 태어난 시대가 평범하게 살기조차 힘든 시대인 것을.
이런 불경기로 인해 생겨난 비관적인 신조어들이 부지기수다. 헬조선과 흙수저는 이미 사전에까지 실릴 정도로 관용적 단어가 되었다. 십 대 때부터 대학입시는 기본, 취업까지 고려해서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와중에 ‘십장생(십대도 장차 백수가 될 것을 생각해야 함)’이란 단어가 생겼고, 예전의 ‘이태백(이십 대 태반이 백수)’이란 말은 ‘이구백(이십 대 90%가 백수)’으로 바뀌어 더 구체적으로 우울해졌다. 대학에서는 졸업예정자만 뽑는 대기업의 공채 자격 때문에 졸업을 미루고 5, 6학년이 된 학생들에 대해 ‘학사 후 과정’을 보낸다고 말한다. 뉴스에서는 졸업예정자를 실업예정자로 만들어버린 이 시대를 고용한파를 넘어선 ‘고용빙하기’라고 칭하기도 한다.
더 이상 분노할 힘도 없어 체념과 우울로 점철된 이 시대에도 호황인 곳이 있으니 바로 이 나라와 대기업이다. 말라비틀어진 서민들을 얼마나 쥐어짰으면 2015년에 비해 2016년에는 세금이 23조나 더 걷혔다고 한다. 마른오징어도 꽉 짜면 물이 나온다던 영화 속 악덕 사채업자의 대사가 떠오른다. 그러면서 대기업에겐 특혜를 주기 바쁘다. 법인세를 낮추고 수천억 원의 전기요금을 깎아준 것도 모자라 청년고용을 목적으로 정부 예산에서 거꾸로 수천억 원을 대기업에 직접 지원해준다. 하지만 정작 공채 채용 규모는 줄어들 뿐이고, 느는 것은 성과급 잔치 규모다. 대리급이면 성과급으로 차를 바꾸고, 팀장급이면 새 차를 하나 더 산다. 이런 실상이니 기를 쓰고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하는 학생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많은 대기업들의 경력 우선 채용 방침으로 인해 청년들은 인턴으로 돌고 돌다 공채 지원 자격 나이를 넘기기 일쑤다. 열심히 일하려고 갔는데 수발부터 들라 해서 죽어라 수발들었더니 넌 일은 할 줄 모르고 수발만 드는구나 하며 인턴은 내쫓고 밖에서 일 할 사람을 뽑는 격이다. ‘딥빡(매우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다는 의미의 신조어)’이란 표현이 절로 나온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이기에 소비 습관이나 행태가 바뀌어 생긴 신조어도 있다. 가용비가 그것인데, 예전엔 가성비라고 하여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제품을 추구했지만, 이제는 성능 따위는 개나 주라 하고 가격 대비 용량이 큰 제품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시발비용이라는 말은 젊은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나 알만한 신조어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을 보충하자면 에이 시발! 하면서 스트레스로 인해 홧김에 저지르는 지출을 말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뜻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짜증나는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 행위는 스트레스 해소인 동시에 일종의 자기 위로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떨쳐버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최근 ‘욜로(YOlO)’라는 말이 유행했다.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직역하면 ‘네 인생은 오직 한 번뿐이다’라는 의미인데, 사실 영미권에서는 무모한 객기를 표현하거나 철없는 행동을 포장하는 용도로 자주 쓰인다고 한다. 영화 〈잭애스〉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쉽게 말해 욜로 하다가 골로 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처럼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된다. 죽어라 돈 아껴 가며 저축하기보다는 너를 위한 여행을 떠나라고 충고할 때 쓰기 좋은 말이다. 물론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며 사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한탕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그 한 번은 생각보다 길다. ‘젊어서 노세~’라며 생각 없이 돈을 흥청망청 쓰면 늙었을 때 가진 거라곤 ‘텅장(텅텅 빈 통장)’뿐인 인생이 될 수 있다. 100세 인생 시대에 노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젊었을 때 죽어라 부은 국민연금도 이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냅다 저지르는 삶을 부추기는 욜로보다 나는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의 소확행은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작은 행복에 초점을 맞춘다. 행복은 꿈처럼 크고 거창한 것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른한 오후, 책을 읽다가 따뜻한 햇볕을 쬐며 낮잠을 자는 것도 행복이다. 소확행이란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사용된 말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 소소하지만 일상 속의 행복인 것은 확실하다.
얼마 전 밖을 돌아다니던 중 날씨가 너무 더워 백화점으로 대피했다. 1층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명품관에는 사람들로 북적댔고 입구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를 통제하고 있었다. 한때 패션의 명소라고 불리던 압구정 로데오거리에도 그 거리만의 특색을 지닌 상점들은 사라지고 중고 명품관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명품 백도 아니고 겨우 명품 브랜드의 쇼핑백이 싸게는 만 원에서 구하기 힘든 것은 몇십만 원까지 호가한다고 하니 불경기에도 명품에 대한 열기는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돈이 많아 혹은 질이 좋은 것을 원해 명품을 사는 사람들은 인정한다. 딱히 명품으로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이려는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 인류애적인 오지랖으로 인해 걱정이 될 뿐이다. 자신을 나타내는 척도는 성품이지 명품이 아니다. 누구나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있지만 명품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인정하는 시대는 지났다. 명품으로 인해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결국 허무한 마음과 후회 가득한 카드값 고지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인생은 한 번뿐!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으니 있는 돈이나 다 쓰면서 행복을 누리자’는 말을 신조어로 바꾸면 아마도 ‘욜로! 이생망 탕진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일시적이다. 만족감은 잠깐이지만 허무함은 오래간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 행복을 찾다가 신용불량자가 되기 딱 좋다. 진정한 행복은 모험이나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다. 항상 우리 근처에 얌전히 숨어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소소하지만 잦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허한 마음을 돈이나 명품이 아니라 일상 속 소소한 행복감으로 채워보는 건 어떨까….
명품이 명품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마는 당신이 명품이 아닐 이유는 하나도 없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