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요구하는 강인함이 나의 섬세함과 충돌할 때

by 스윗퍼시먼

상담실 문을 열었을 때,

사실 이 자리까지 오는 데 한참이 걸렸다.


수차례 상담 권유를 받았지만,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내가 환자라고 생각하나?”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닌데..."

하는 불쾌함이 먼저 올라왔다.

하지만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도, 나도 그만큼 지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잘 대처하셨어요.”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잘하고 계신 거예요. 다른 분들과 비교해도, 훨씬 침착하고 냉정하게 잘 대응하셨습니다.”

칭찬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내 속은 편치 않았다.

맞다.

나는 환자가 아니라, 잘잘못을 가리지 못한 세상의 잘못을 고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 ‘잘했다’는 말이, 내게는 마치

“그래도 살아남았잖아요”

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칭찬이 필요한지도 모른다는 걸.

단순히 강인함을 증명하는 칭찬이 아니라,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라는 확인이 필요했다.



상담실 안에서 발견한 공통점은

우리는 모두 다른 사연을 안고 있었지만,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제도가 너무 느리다.”

“정작 필요한 순간엔 아무것도 막아주지 못한다.”


맞았다.

상처를 주는 건 사건 그 자체만이 아니었다.

그 후에 이어지는 절차, 반복되는 진술,

가해자에게만 주어지는 수차례의 소명 기회—

이 모든 과정이 피해자를 다시 데리고 사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사람들은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부른다.

흔들림이 없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불혹을 동경했지만,

마흔은, 더 많이 흔들리는 시기였다.

다만 흔들리면서도 예전보다 빨리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흔들림이 사라지는 게 불혹이 아니라,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 게 불혹이다.

이미 지독한 사십춘기를 지나 알게 되었다.

나는 그걸 뒤늦게 배웠다.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불안이 자라고,

한쪽에서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 두 가지가 계속 부딪히며 내 안을 쓸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은 강인해 보여요.”

“그렇게 대응한 거면 대단하죠.”


하지만 강인함은 언제나 섬세함과 함께 온다.

세상이 요구하는 ‘강인함’은,

때로 내 안의 ‘섬세함’과 정면 충돌한다.

강인함은 내 몸을 지켜줬지만,

섬세함은 내 마음을 살려줬다.

둘 중 하나라도 버렸다면,

나는 아마 지금 이렇게 쓰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상담사는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을 자신의 성장의 모멘텀으로 삼아 보세요.”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래 내 안에 남았다.

‘성장’이라는 말이 처음엔 불편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성장하고 싶지 않았다.

사건이 내 성장을 위한 재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다른 마음이 들었다.

성장은, 사건이 주는 보상이나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사건을 어떤 형태로 남길지에 달린 거구나.


나에게 다짐문도 내밀었다.

성장모멘텀, 더 이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흔들린다 해도, 끝내 다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이제

내 나이는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할 나이다.

논어에는,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지 않던가.

만약 이 나이에 이런 일을 겪었다면,

그것도 다 뜻이 있는 거겠지.

사십춘기의 지독한 흔들림 속에서,

불혹을 배우라고 주어진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이제 나는 안다.

지천명은

세상에 맞서서도 나를 잃지 않는다는 건,

내 안의 섬세함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다음 상담이 예정 중이다.

아직도 지하철을 생각하면 대신 걸을 때가 많고,

낯선 이의 시선에 경계심이 올라올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부끄러운 반응이 아니다.

그건 살아남기 위한 반응이고,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세상이 요구하는 강인함은,

내 안의 섬세함을 죽이지 않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 문장을, 오늘의 나에게 남긴다.

강해야 하지만,

섬세함을 잃을 필요는 없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이,

진짜 단단함이니까.


이 글이 닿아야 할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강함과 섬세함이 함께할 때, 살아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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