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이라는 굴레

by 스윗퍼시먼

1. 법정은 왜 가해자를 기다려주는가


나는 생각했다. 법은 왜 늘 가해자를 기다려주는가.

피해자는 늘 정해진 시간에 맞춰 불려 가야 하는데, 가해자는 언제나 사정이 고려된다.

한 번은 검사 교체로, 또 한 번은 증인 일정 조율로, 그다음에는 누군가의 개인 사정으로 미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법정은 그 모든 지연을 너무도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존중해야 하니까요."

그 말은 이 재판의 주문처럼 반복되었다.

나는 그 불균형의 온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법정의 냉기는 냉정이 아니라, 차별된 배려의 온도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했다. 하지만 법정의 시간은 달랐다. 가해자의 시간은 존중받고, 피해자의 시간은 소모되었다.

그 시간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2. 세 번 바뀐 검사


검사는 세 번 바뀌었다.

사건 번호는 같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그 검사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까.

세 사람 모두 달랐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그들은 모두 절차를 믿었고, 나는 그 절차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첫 번째 검사는 꼼꼼했다. 그러나 그 꼼꼼함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서류를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검사는 바빴다. 그래서 나는 간결해야 했다. 내 고통도 요약되어야 했다.

세 번째 검사는 친절했다. 하지만 그 친절은 거리가 있었다. 마치 환자를 대하는 의사처럼, 증상은 듣되 아픔은 듣지 않는.

그 어떤 이도 내 고통의 무게를 대신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3. 반복된 증언, 그리고 다시 그날

증인 출석 날짜가 다가올수록 숨이 막혔다.

나는 상담사에게 말했다. "증언하러 나가려니 무섭고… 또 그 이야기를 하려니 싫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해야 해요. 이번엔 울어도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울고 싶지 않아요. 냉정하게, 차갑게 말하고 싶어요."

그러나 그날 법정에서 나는 울었다.

판사의 질문이 내 마음 한가운데를 건드렸을 때, 말로는 버틸 수 없던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그 눈물은 연약함이 아니라 분노의 무력감이었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울 수밖에 없었다.

증언은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가 아니라, 상처를 다시 여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상처는 법정의 형광등 아래 낱낱이 드러나야 했다.



4. 시선의 재판


법정에 들어서자 판사의 목소리가 정중했지만, 시선들이 나를 덮쳤다.

가해자는 내 오른쪽에 있어야 했지만 분리되어 있었고, 변호인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쪽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 정중함이 오히려 내 자유를 빼앗았다.

나는 얼굴을 돌릴 수가 없어 정중한 판사님만 응시했다. 그들을 보지 않고도 내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나는 천장을 보았다가, 바닥을 보았다가, 증인석의 마이크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말보다 시선이 더 많은 것을 증언한다는 걸.

법정은 언어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선의 전장이었다. 그리고 그 전장에서 피해자는 늘 노출되어 있었다.



5. 시간이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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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침묵, 그 속에 숨은 비명을 저는 문장으로 꺼내고 싶었습니다. 20대엔 공학을, 30대엔 정치를, 40대엔 다시 육아를, 지금은 민낯을 경험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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