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속도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

by 스윗퍼시먼

1. 정의는 어디로 가고 있었나


사건이 발생한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기다렸다.

경찰의 조사가 끝나길 기다렸고, 검찰로 송치되길 기다렸고, 공판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도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은 참을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삶이 정지되는 것이었다. 사건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나는 그 진행 속에 묶여 있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이 그저 서 있어야 했다.

처음엔 믿었다. 법이 나를 보호해 줄 거라고. 정의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법은 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절차를 보호하고 있었다. 정의는 나를 향해 달리는 게 아니라, 제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날, 경찰은 빠르게 대응했다. 현장에 도착해서 나와 가해자를 분리했고, 진술을 받았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법이 나를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속도가 달라졌다.

수사는 길어졌고, 검찰로 송치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공판은 여러 번 연기되었고, 검사는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기다려야 했다.


법정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나도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건 존경이 아니라 눈치를 보는 것이다. 판사는 형평성을 위해 절차를 강조한다. 검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합리성을 요구한다. 변호인은 피고인의 권리를 위해 예측 가능성을 말한다. 그 사이에 있는 나는, 내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저 감정에 치우친 사람이 되어버린다.


증언대에 서면서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 삶의 한 장면을 재연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방송 중인가?'

그 자리에 서면 과거는 서사가 아니라 증거가 된다. 내가 느낀 감정은 객관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게 된다. 눈물은 불리하고, 무표정은 비인간적이라는 말이 뒤에서 들리는 듯했다.

질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되물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말한다고 어떻게 이해할까?'

하지만 거기서 내가 물으면 안 된다.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고, 답변만이 나에게 허락된 영역이다.

어떤 질문은 이미 대답을 정해두고, 내가 그것에 맞춰 끼워 맞춰야 할 때가 있었다.

모순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지하철 안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라고 느낀 순간과 닿아 있었다.



2. 정의의 속도는 얼마쯤 될까


나는 언젠가부터 정의의 속도가 궁금해졌다.

교차로에서 신호위반을 하면 바로 경찰차가 따라붙는다. 과속을 하면 단속 카메라가 찍는다. 주차 위반을 하면 딱지가 붙는다. 그런 것들은 빠르다. 거의 즉각적이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의 피고는 1년이 지나도 구속조차 안 되는 걸까? 왜 나는 1년 반이 지나도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정의라는 이름은 쏜살같아야 하지만, 그 끝은 늘 시스템을 향해 있다. 나 같은 사람은 그 시스템의 사례가 될 뿐이다.

예를 들어, n 번 방 사건을 생각해 보자. 정의는 폭주했고, 국민의 분노에 힘입어 속도도 빨랐다. 그러나 그 안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얼마나 지속되었나? 정의는 사건 해결과 제도 안착이라는 두 갈래로 나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는 다시 잊히는 존재로, 정의는 시스템의 자랑거리로 남는다.

2016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대통령 탄핵 사건. 그때 수많은 국민들이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고, 헌법재판소는 그들의 목소리에 응답했다. 그 결과는 단 한 사람의 권력자에 대한 '속도 있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한 평범한 시민이 피해자로서 내미는 탄원서는 그렇게 빠르게 읽히지도 않고, 의미 있게 해석되지도 않는다. 시민의 목소리는 때로는 가장 가까이에 있어도 가장 늦게 도착하는 정의의 종착지였다.


나는 어딘가 도착은 하겠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모른다. 마치 정비되지 않은 철도 위를 달리는 기관차에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덜컹거리고, 흔들리고, 때로는 멈춰 서기도 한다. 언제 도착할지, 어디에 도착할지, 도착한 곳이 내가 원하던 곳인지도 모른다. 그저 타고 있을 뿐이다. 법은 나에게 '절차를 믿으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절차 속에서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 돌아온 건 늘 '절차상 문제없음'이었다. 그 절차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나도 하나의 의식을 치르듯 살아가야 했다.


법정에 나갈 때, 나는 고민했다. 어떻게 보여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떻게 행동해야 제대로 된 피해자일까. 울면 감정적이라고 하고, 울지 않으면 진짜 피해자 같지 않다고 한다. 침착하면 충격이 적었던 것 같다고 하고, 떨면 과장하는 것 같다고 한다. 결국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만 들기 시작했다.

피해자는 완벽한 피해자여야 인정받는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틀에서 벗어나면, 의심받는다.

이건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여기서는 교칙이 우선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존중은 제도 위에서만 유효한 장식물처럼 느껴졌다.



3.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정의는 무엇이었나


나는 이제 안다. 정의는 나를 향해 달리지 않았다. 정의는 제도를 향해, 절차를 향해, 시스템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저 일정했다. 피해자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가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며, 절차를 준수하며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속도에 맞춰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속도를 찾기로 했다. 판결을 기다리면서도, 내 삶을 살기로 했다. 법정의 시간에 묶여 있으면서도, 내 시간을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찾은 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느렸고, 불완전했고, 때로는 불공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을 믿었다.

정의가 누구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를 묻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정의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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