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딱 좋아> 하수정 글그림 / 웅진주니어
1931년에 태어난 춘례 씨는 한복집을 운영하며 홀로 딸을 키웠습니다. 억척스러운 시간을 보낸 춘례 씨 밑에서 그녀의 딸은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올해로 92세가 된 춘례 씨 집에는 4대가 모여 삽니다. 춘례 씨의 딸의 딸이 딸을 낳았거든요.
춘례 씨는 머리칼이 온통 하얘져도 마음만은 '청춘 저리 가라'였습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뜨개질, 한글 등을 배우러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하루가 바빴습니다. 비록 다 배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 까먹을지라도 배움을 향한 춘례 씨의 열정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할머니 정말 멋지지요?)
그런데 2020년, 코로나로 온 세상이 멈추면서 춘례 씨의 세상도 멈췄습니다.
다니던 노인복지센터가 모두 문을 닫자 하루아침에 춘례 씨는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코로나가 2년이 넘도록 지속되는 동안 춘례 씨의 호기심과 자신감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백팩을 매고 다니던 꼿꼿한 허리가 이제는 제법 ‘할머니 허리’ 같아졌습니다.
무엇보다 생활반경이 집 안으로 좁아진 춘례 씨의 다리는 점점 뻣뻣해졌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가족들과 외출해도 걷는 게 영 불편했습니다. 모두가 일터로 떠난 대낮에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넘어져서 멍 든 채 돌아오는 날도 많았습니다.
결국 춘례 씨는 집순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춘례 씨의 낙은 네모난 베란다 유리창으로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일입니다. 베란다에 놓인 캠핑용 의자는 춘례 씨의 딸이 엄마 편히 구경하시라고 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춘례 씨의 뒷모습을 보며 '늙어버린 마음'에 대해 자주, 오래 생각했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봄날, 할머니가 그네에 앉아 아이처럼 미소 짓고 있습니다. 어린이그림책인데 할머니 혼자 등장하는 표지라니, 새롭지 않나요?
할머니 발끝에서 <지금이 딱 좋아>라는 제목이 피어납니다. 금박으로 후가공한 제목은 실제로 보면 반짝반짝 빛이 나서 할머니의 환한 미소를 더욱 빛내줍니다. 할머니가 딱 좋다고 하는 '지금'이 궁금해 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여기서 세상 다 보인다. 여 다 있는데, 뭣 하러 밖에를 나가…."
할머니는 방바닥에 앉아 베란다 너머로 세상을 내다봅니다. (책의 첫 페이지인데, 저는 이 장면을 보자마자 춘례 씨가 떠올라 울컥했습니다.)
"진선아, 잘 잤어? 밤새 춥지는 않았고?
얘가 또 왜 이래. 불이 안 들어오네. 너 이거 끓이고 있는 거 맞지?
눈에 안 보인다고 암것도 안 하는 거 아니잖여?
그잖여? 내 알지, 다 알어."
할머니는 '주전자 진선이'에게 간밤의 안부를 묻습니다. 오래되어 고장난 듯하지만 제몫을 톡톡히 해내는 진선이의 열심을 알아주는 할머니. 할머니는 진선이 덕분에 오늘도 추억이 담긴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이고, 우리 민철이. 지 손등처럼 뽀얗게도 빨아 놨네.
늙어 겉으로는 쭈글쭈글해져도 속으로는 점점 매끈해지고 싶었지."
"곱다, 우리 민식이. 지 이마처럼 윤나게 잘도 닦았네.
늙어 쭈그러진 내 이마도 닦으면 이래 반질해질라나?
얼굴은 몰라도 마음은 닦으면 그럴 것도 같구나."
할머니는 '세탁기 민철이'가 빨래한 뽀송한 옷가지를 보며, '걸레청소기 민식이'가 닦고 지나간 반질한 방바닥을 보며 당신의 속내를 내비칩니다.
'냉장고 영순이'도 있습니다. 할머니는 영순이를 보면 눈 오는 날 만든 눈사람을 냉동실에 숨겨 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아이고, 근데 귤이 왜 이렇게 됐냐? 쭈그러져 없어질라고 하네.
사람도 이래 쭈그러들다 나중에는 없어지겠지.
쪼그라들고 없어진 것들은 다 어디 갈까?
영순이 니 생각은 어때?"
"우리 봉선 여사가 해주는 밥이 최고야.
나는 아무리 해도 이래 차지게 안 되더라니까.
맛난 거 많이도 해줬는데 그떄 잘 배워놓을걸 그랬어."
'봉선 여사'는 다름 아닌 빨간 밥솥입니다. 할머니는 봉선 여사가 지어준 엄마 마음 같은 뜨듯한 밥을 삼킵니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엄마 이름에서 따왔나 봅니다.
"계석 씨. 당신은 징하게도 무뚝뚝하네요.
말이 아니면 뭔 소리라도 내 봐요.
하긴, 암말 안 해도 거기 있는 거 내 다 알지.
내 옆에 있는 거 다 알지."
"아이고, 딱 좋네. 여기가 딱 좋아.
지금이 딱 좋아…."
이 집에서 소리라고는 할머니의 말소리뿐입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지금이 딱 좋다고 말하시며 잠에 듭니다.
할머니가 단잠에 빠진 게 아니었나 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흐느끼던 할머니가 갑자기 축 늘어집니다.
깜짝 놀란 진선이, 민철이, 민식이, 영순이, 봉선 여사, 계석 씨가 할머니를 불러 봅니다.
"할머니! 일어나 보세요.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도 꺼져 있는 거 같지만 꺼진 거 아니죠?"
"그동안 할머니는 매일같이 우리 이름 하나하나 다 불러 주면서 이뻐해 주셨는데, 우리는 할머니 이름도 몰라. 할머니이… 엉엉."
"할머니! 일어나요, 할머니!"
쿵쿵 쾅쿵. 쿵쿵. 아무리 소리를 내보아도 할머니는 듣지 못하네요.
쿵쿵쾅쿵. 쾅쿵쿵쿵. 진선이, 민철이, 민식이, 영순이, 봉선 여사, 계석 씨의 소음에 할머니의 아랫집에 사는 청년이 화가 났어요. 경비 아저씨와 함께 초인종을 눌러 보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요양 보호사에게 연락해 할머니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는데요.
그 시각, 할머니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환하디 환한 하늘을 온갖 빛과 함께 두둥실 떠다니는 꿈을요.
"고애순 씨! 고애순 씨!"
누군가 이름을 부르자 할머니는 그제야 깨어났습니다. (할머니의 이름은 '고애순'이었군요. 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름을 잃어가는 걸까요.)
"오늘은… 좀 다르게 해…볼까?"
지난 밤, 마음이 늙다 못해 꺼져 버릴 뻔했던 일을 겪고 난 애순 씨는 새로운 날을 맞이하며 새로운 마음을 먹습니다.
"아이고, 나 땜에 얘는 장롱에 걸린 채로 세월 다 보냈구나.
오늘따라 옷이 좀 큰가. 아님 내가 더 쭈그러든건가…."
애순 씨가 오랜만에 외출을 하려나 봅니다. 예쁜 꽃무늬 옷도 꺼내 입고, 진선 씨가 끓여준 따뜻한 차를 보온병에 담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도 주먹을 꼭 쥐는 애순 씨. 아무래도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나가는 일에 용기가 필요해 보입니다.
와. 푸릇푸릇한 나무 좀 보세요. 봄이에요. 애순 씨는 아파트 복도 난간에 기대 봄의 풍경을 내려다봅니다. 애순 씨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크면 좋겠습니다.
"이 차를 다 마시면 진짜 봄이 올 것 같아요."
애순 씨는 경비 아저씨, 요양 보호사, 아랫집 총각과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십니다. 애순 씨의 안녕을 응원하는 사람들 속에서 따스한 마음들이 번집니다.
"내가 아직 오지도 않은 때를 생각하고 미리 시들어 있었네."
혼자 남은 애순 씨는 주름 진 양 손바닥에 노란 햇살을 한가득 담아 봅니다. 묵직한 커튼 뒤에서도 "지금이 딱 좋다"며 한껏 웅크려 있던 애순 씨는 바깥 세상을 두려워했던 만큼 갈망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꿈을 꿀 만큼 말이죠.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합니다.
"세상에! 하늘 파랑이 이랬나….
이 나이 먹도록 태어나 처음 보는 파랑이네!
매일 나와서 봐야겠는걸."
저는 애순 씨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을 보며 또 한 번 울컥했습니다. 이 책을 본 그 주의 토요일에 저는 오랜만에 춘례 씨와 산책을 했습니다. 춘례 씨는 제 손을 잡고도 행여나 넘어질까 당신 발을 내려다보며 조심조심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었습니다.
"할머니, 잠깐 멈춰서 하늘도 올려다봐 봐. 하늘색이 예뻐."
제 말에 할머니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는 싱긋 웃습니다.
"그러네…."
<지금이 딱 좋아>는 단순히 노인의 현실을 조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늙어버린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스스로 정한 기준과 한계에 갇혀 한 발짝 앞으로 내딛지 못하는 모두를 위한 책입니다. 저 역시, 자꾸만 '못 하는' 핑계를 대며 내 마음을 스스로 늙게 하지는 않았나 반성해 봅니다.
봄이 왔습니다. 공기 맑은 날, 춘례 씨와 또 손잡고 밖을 거닐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