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혼자 다니던 그 아이

<삐비 이야기> 송진헌 글그림 / 창비

by 진영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혼자가 좋아서, 혼자가 편해서, 혼자 있고 싶어서 혼자인 것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과 혼자이고 싶지 않은데 혼자가 되어버린 사람의 삶이 아주 다르듯 말이죠.


제가 열네 살 때 같은 반에 언제나 혼자 다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혼자가 되어버린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를 혼자로 만든 아이들은 그 아이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이름이 네 글자였던 그 아이를 부를 때는 이름 중 두 글자를 따서 '노비'라고 불렀거든요. 조선시대도 아닌 21세기에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고작 열네 살 먹은 애들이 자기만큼 어리고 여린 존재를 '노비'라고 부르는 광경은 정말 괴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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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더 많을까, 피해자가 더 많을까. 서른 명이 모인 한 학급에 따돌림을 당하는 피해자는 한 명이고, 따돌림을 주도하는 가해자가 서너 명이라고 치면, 나머지를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지난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고 내린 저만의 답은 '방관자가 더 많다'입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바로 그 방관자 중 한 명이었고요.


방관자는 피해자에 속할까, 가해자에 속할까 생각해보았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내리지 못했습니다. 방관자를 또 다른 피해자라고 보면 진짜 피해자에 대한 기만 같고, 또 다른 가해자라고 보기엔 나름의 억울함이 있을 테니까요.




여기, 방관자를 전면에 내세운 그림책이 있습니다. 따돌림을 당하는 '삐비'와 방관자에 속하는 주인공 '나'의 이야기를 그린 <삐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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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들은 자신들과 어딘가 달라 보이는 삐비를 함부로 놀리고 피해 다닙니다. 주인공 '나' 역시 삐비에게 굳이 다가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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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 역시 삐비에게 굳이 다가가지 않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어느 날, '나'는 숨어들어간 숲에서 삐비와 마주칩니다. 놀란 '나'를 보고도 삐비는 그냥 지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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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걷게 됩니다. 삐비는 삐비는 나뭇가지를 한 움큼 주워들고는 머리를 때리며 걸었습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도록 세게 때리다가 부러지면 또 하나로 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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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악, 따악' 소리를 내며 숲속을 돌아다니는 삐비가 궁금해진 '나'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숲으로 찾아갑니다. 그렇게 '나'는 삐비와 하나밖에 없는 짝이 되어 숲을 탐험하는 재미를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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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제 아이들은 '나'를 보고도 피해 다녔습니다. 하지만 '나'와 삐비는 서로가 있어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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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나'는 학교에 가게 됩니다. 하지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삐비를 두고 아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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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도 삐비를 피해 다닙니다. 집에 가는 길에 삐비를 보아도 모르는 척 지나가고, 삐비는 다시 혼자가 되었지. 변하지 않는 건 여전히 숲속에서 들려오는 '따악, 따악' 소리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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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나'는 숲속에서 비를 맞고 있는 삐비를 마주칩니다. 얼결에 도망친 '나'는 빗속에 혼자 있을 삐비를 생각하지만 다시 숲으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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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각합니다. 이제 삐비는 정말 혼자가 되었다고, 아니 어쩌면 삐비는 처음부터 혼자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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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삐비를 끝내 모른 척한 '나'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노비'라 불리던 그 아이는 저에게 '삐비'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그냥 같은 반 애들 중 한 명이었다가, 몇 번 같이 놀았다가, 주변을 의식하느라 어색하게 멀어진 삐비.


그러면서도 내가 삐비에게 못해준 무언가를 '나'는 해주기를 내심 바랐던 걸까요? 책장을 덮을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희망은 '따악, 따악' 소리를 내고 부서져서 안타깝고 아쉽고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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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먹먹한 기억과 감정을 이 책은 날카로운 흑백의 연필선으로 그려냈습니다. 여기에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화자의 담담한 문장은 쓸쓸함을 더합니다. 그리고 마치 누구에게나 삐비 같은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듯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책감을 쿡쿡 찌릅니다.


이 책의 저자 송진헌은 "삐비는 실질적인 신체·정서적 장애를 지닌 아이뿐 아니라 사회적 집단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내는 모든 아이들의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우리 주위의 소외된 아이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몸과 마음이 큰 지금, 저는 잘 압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바라보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을. 외면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을. 오래오래 잊지 않으려 합니다. 이 책을, 그리고 그때 그 아이의 건조한 표정을, 작은 어깨를,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던 제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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