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고 버겁다. 그래도 비겁하게
아무도 없는 행성에서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외딴 나라나 섬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저 먼 이름 모를 행성에서 혼자 살고 싶단 생각. 혹시 모르는 나 아닌 다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단 0.1% 도 남겨두지 않게.
허무맹랑한 소리이고 불가능한 상상이다. 그래서 슬프다. 어떤 영화에서 나왔던 마지막 대사처럼.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후벼 파지만 잠시나마 씁쓸한 결말을 품은 공상만화영화 한 편 봤다 생각하고 오늘도 이 지구에 비벼 살아가야지. 어쩌겠어. 지구에서 태어난 걸.
지난 엄마의 이사 이슈를 다소 찜찜하게 마무리 짓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후련함 보다 강하게 남아버린 숙제 같은 돌덩이들. 수없이 오가는 스트레스 속에 나눠 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무수히 많이 했다. 그래서 넋두리처럼 고향친구들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들을 하나둘씩 이야기하다 보면 그저 지난 술자리농담으로 여겨져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잔뜩 쌓여버린 먼지는 터는 것보단 닦아 내는 게 좀 더 효과적인가 보다. 털린 먼지는 닦아 주워 담고 버리지 않으면 또다시 떠돌다 쌓이고 말더라니까.
고민은 참 먼지 같아.
계속 쌓인다. 하나 해결했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주구장창 쌓인다. 누구나 먼지 한두 개쯤은 품고 살지 않는가. 한두 개라니? 한두 뭉치라고 해야 하나? (먼지 없는 행성으로 가야지 난.)
엄마와 누나는 책임져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엄마가 누나를 책임져 달라고 한 적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가족이기에 어디까지나 책임이라는 것이 따라다니게 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보통보단 적고,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나'라고 생각되기에, 그에 따라 우리 가족에서 나는 책임이라는 것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같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엄마와 누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했다. 한없이 강하다고만 생각했던 엄마도 이제야 보이는 굽은 허리와 깊은 한숨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 준다.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일까.
말하진 않았지만, 그래주길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제야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일까. 매번 가족에게 생기는 사건들이 무럭무럭 책임감에게 물을 주고 있는 듯하다. 크디크게 자라난 오늘. 허무맹랑하지도 불가능하지도 않은 상상을 하게 되었다.
절대적으로 바라는 것 중 하나는 나의 꿈을 달성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행복도 아니다. 부디 내가 엄마와 누나보다 세상에 오래 존재했으면 한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엄마와 누나가 없다면 비로소 가족이 없는 나는 이 지구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억울함과 답답함보다 훨씬 더 큰 가벼움을 느낀 채.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하다. 누구나 그런 상상 한 번쯤은 하지 않았겠는가. 혹은 농담처럼 주고받는 대화중 하나 일수도 있고 말이다. 책임을 체크하게 된 계기가 된 건 아닐까. 지나고 나면 다 별거 아니란 모든 일들에 이번일도 포함이 되었겠지. 지난 세월 엄마가 짊어졌던 무거운 책임감에 굽어진 허리를 조금이나마 펴드리고, 이제 나에게 덜어내고 살아가시길 바란다. 그래서 난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 좀 더 튼튼한 몸과 정신을 만들어야 한다. 굽어질지언정 부러지진 않게. 시간 지나 고개 들어 하늘 볼 힘조차 없더라도, 그저 바닥에 누워 푸르른 맑은 하늘 보면 그만 이겠거니.
고민을 해서 고민이 없어진다면 고민이 없겠다.
어차피 무겁고 버겁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뒤에서도 그랬었다.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으면 한다. 지쳐가는 나에게 당근을 눈앞에 두며 채찍질한다. 정리가 필요하겠지만 시간 지나면 다 또다시 흐트러지더라고.
그렇다고 흐트러진 걸 내버려두고 쌓을 수 없잖아. 차곡차곡 하나씩 하나씩 책임감을 제외 한 다른 것들을 놓아보려 한다. 차갑지 못해 놓지 못했던 것들에게 미리 작별을 고하며.
오늘은 생각의 조각을 이 지구에 남긴다. 다음 행성에서 만나요.
내일을 알 수 있으면 좋겠어.
오늘 좀 쉴 수 있게 말이야.
어제는 오늘이 이럴 줄 몰랐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