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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지평선

이 모든 게 이벤트라니.

by 진작

살면서 겪은 무수히 많은 일들 중에 유독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는 일들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 보다 더한 것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인데도 해결이 안 되는 일이겠지. 푹푹-한숨 내쉬며 길을 걷다 활짝- 열린 통신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흥겨우면서도 귓가에 맴돌았다.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노래였다. 예전에 들어본 적은 있지만 관심 깊게 듣거나 반복 재생한 적은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생각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야지. 그러다 왜 노래의 제목이 <사건의 지평선> 일까?라는 것으로 시작했다. 꼬리 한번 물어봐? 한 번만 물었을 뿐인데 깨갱하며 뜻을 알려주더라. (역시 정보의 바다 인터넷.)


*사건의 지평선: (event horizon)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그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경계면이다. (이하 생략)


여기서 놀란 점은 두 가지이다.

사건의 지평선이랑 뜻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사건의 지평선>에서 사건의 영어표기가 [event]라는 점.


Event?


이벤트?


이게 나를 위한 이벤트였어?!


폭. 풍. 감. 동...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여기서 눈물 닦고 알게 된 사실은... '난 이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사건=이벤트?


이벤트의 시작은 이렇다.

기분이라도 좋아지게 '트'라고 말하려 한다. 사건이라고 말하면 거창하게 우울해질 것 같아서.


2024년 12월 말은 엄마의 집 계약이 끝나는 날이다. (현재 엄마의 집은 전세.)

그런데 집주인에게서 11월 말에 연락이 와서는 전세금을 올릴 것을 통보했다. 2300 원룸에서 1000을 올리다니.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4년 차가 넘은 시점에서는 전세금상향 금액 한도를 넘겨 현시세로 계약 조건을 내밀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2년이 넘었을 무렵 상향한도를 지키며 전세금을 올린 이후 처음 부딪혀 보는 전세금상향금액이다. 당황한 엄마는 일단 구두로 1000을 마련해서 재계약을 할 것을 전달했다. 그렇게 다음날 재계약을 위해 만남일정이 잡혔고, 엄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분과 부동산에 가서 현주인에 대해 알아봤더랬지. 그러다 집주인이 잡혀있는 빚들을 알게 되었고 불안감에 휩싸인 엄마는 즉시 재계약을 안 할 것을 통보하고 이사할 집을 알아보았다. 어쨌든 12월에는 계약이 만료이기에 이사는 가야 하니까. 엄청난 속도로 집을 알아봤고 다행히도 마음에 드는 집을 가계약까지 끝내게 되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깜짝 이벤트들의 연속이니 감동의 물결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감동의 소용돌이라 상향조정하겠다. (폭풍감동)


12월 말(계약만료)까지 주기로 했던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한 달의 시간을 더 약속받은 채 1월 이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나 또한 이사를 도우러 내려가는 차편을 알아보고 있었다.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전세금은 1월이 되어서도 돌려받지 못했다. 화가 난 엄마는 나에게 통화를 해보라 말했고 나 또한 약간은 격양된 목소리로 집주인과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나름의 조율은 한 것은 2월이었다. 도저히 돈이 없다는 집주인은 2월 안에는 무조건 주겠다고 했다. 통화 중 녹음으로 증거라도 남겨두긴 했으나, 불안한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뭔가 괜히 괘씸하고 밉다. 엄마 동네에서 떠도는 집주인의 소문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안에 떨고 있는 엄마를 진정시키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되려 나도 같이 짜증을 내며 사이만 멀어지는 느낌이 들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가계약금을 날리지 않기 위해 남은 금액을 구해 다음 주까지 엄마한테 보내드리는 일뿐이었다. 기어코 돈을 빌리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것 보아라. 얼마나 멋진(?) 사건. 아니 이벤트인가. 우리나라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 일어나다니. 법정공방으로 가면 느껴지는 피로도와 금액들이 부담스러워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결국 '돈' '돈' '돈'.

그놈의 돈이 무엇인지.


'아. 돈 님... 놈이라고 한건 취소할게요...'


무턱대고 겁에 질려 다른 집을 덜컥-계약하고 가계약금까지 넣은 엄마가 살짝-원망스럽다가도, 결국 잘못은 엄마가 아니라 돈을 돌려주지 않는 집주인에게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했다가. 결국 왜 난 또 이런 스트레스에 우울해져있어야 하나 라는 팔자 탓을 하게 된다. 결국결국결국결국 이건 도대체 어떻게 끓인 국인지.

결국이라고 말해 놓고 결말은 없고, 빙글빙글-돌기만 하는 결국생각.


돈과 빚. 그리고 깨져버린 믿음 때문에 멀어져 버린 아빠가 생각났다. 그 이후 내게 남은 가족은 엄마와 누나뿐. 사실 내가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족.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는 하지만 알 수 없는 책임감은 언제나 늘 힘이 되거나 힘이 들게 만드는 존재이다. 이번만큼만은 돈 때문에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엄마마저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이 남은 우리 가족 관계에 흔들림 없는 단단한 돌멩이 같다는 느낌이 들길 바란다. 아니다. 돈독해지지 않아도 된다. 흔들지만 말았으면.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외부에 영향이 없는 경계선. 그 경계선에 늘 나와 엄마, 누나가 존재했으면 한다.


사건의 지평선에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건의 지평선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아귀찜과 누나가 좋아하는 새우깡이 가득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좋겠다. 그러면 참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엄마와 누나가 좋아하는 것이 가득 있는.


그렇지만 이런 라면 다신 없었으면 좋겠다.


난 이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법대로 하고 싶은데.
그것도 시간과 돈.
맘대로 하고 싶은데.
그것도 시간과 돈.
결국 법도 맘도 내 맘대로 안돼.
하긴.
내 맘도 내 맘대로 안되는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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