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에게 고백하는 날.
오늘은 용기 내어 볼래요. 눈이 시려 제대로 봐준 적 한번 없지만, 꾹-참고 두 눈 마주친 채 말해볼게요.
당신이 있기에 오늘 내가 (집에) 있을 수 있다고. 부끄러워 말아요. 그럼 뜨거운 입김이 나올 것 같으니.
늘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차갑게 대해주세요. 난 괜찮으니까. 아니 오히려 좋으니까요.
지나고나야 소중함을 느끼고 사라져 봐야 빈자리가 보인 다했던가. 극도로 싫어하는 계절이 오고 있다. 매년 싫다고 말하는데 매번 찾아오는 거 보면 보통 멘탈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작년보단 괜찮은 것 같단 위로를 삼으며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때늦은 예약으로 에어컨 청소가 밀려버리는 바람에 지금으로서 가장 의지하고 믿고 있는 존재는 바로 '선풍기'. 그냥 선풍기가 아니라 '나의 선풍기'
이렇게 말해줘야 좀 더 끈끈해 보이고 유대가 깊어 보이지 않는가.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선풍기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저번주에 몰아보게 된 넷플릭스 <광장>이라는 작품에 대한 글을 써보려 했었는데, 등 뒤에서 살랑살랑- 건드리는 선풍기의 시선이 느껴지니 언급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지. 그리고 지난밤 선풍기가 너무나도 고마웠기에 안 쓸 수가 없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고래가 춤을 추는 건 볼 수 없지만 나의 선풍기가 빙글빙글 춤추는 건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젯밤 대충 끊여먹은 라면을 배에 채워 넣고 러닝을 하러 갔었다. 땀을 좀 내고 싶어서 계절에 맞지 않게 두껍게 입고 간 게 화근이 된 것인가. 원하는 땀은 많이 났지만 이상하게 돌아오는 길에 금방 식어버리는 땀 덕에 몸이 이상하게 급격히 다운되어가고 있었다. 상쾌하고 씻고 나온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덜 상쾌한 기분은 정말 오로지 기분 탓인 걸까. 로션을 다 바르고도 식혀지지 않는 몸의 열기. 이상했다. 설마 6월에 벌써 더위를 먹었다고? 여름한테 내가 벌써 당했다고??? 내가!?!?
당하고도 남지. 매년 당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하다. 벌써부터 당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원인 모를 오한과 열기. 이상할 만큼 긴장이 느껴지는 팔다리에 정신줄을 붙잡고 재장전하기 시작했다. 보통 몸이 안 좋으면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는 편이다.
'감히? 아프다고? 바이러스가 들어왔다고? 나가!!!'
'어서 와. 내 몸은 처음이지? 무찔러주마!!!'
'이길 수 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수다스럽게 자기 최면을 걸기 시작한다. 나름 노하우 라면 노하우. 정신력이 세상살이에 많은 것을 차지하고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아플 때도 이렇게 이겨내려 한다. 하지만 쉽지 않았던 어젯밤에는 발밑에 선풍기를 풀가동하고 잤다. 잠이 들기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회전으로 돌려놓은 선풍기가 고개를 돌리며 나를 보살펴 주는 것 같았다. 이거 뭐지? 고맙다............... 감동받는 중인가 봐...........
자고 일어났더니 말끔해진 몸 상태에 괜히 뿌듯해졌다. 그리고 선풍기에게 휴식을 주고 아침 운동을 다녀왔지. 밤새 간호를 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살다 보니 선풍기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살다 보면 사람에게 감사한 일만큼이나 사물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 감사하단 마음이 들어서 감사를 표한다는 게 어려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닐 수도.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감사하며 살아가려는 이유는 웃음이 존재하기 때문. 감사인사를 하며 새어 나오는 웃음이 서로에게 제법 힘이 난다. 기왕 하루를 보내는 김에 웃으며 하루를 보내고 사소한 것에 감사하다 보면 내일도 웃을 일이 있을 것 같단 기분이 든다. 그럼 말 다한 거 아닌가. 오늘도 웃었고 내일도 웃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한 행복이 어디 있겠나. 소소하다 못해 소박 할 순 있지만 원래 소중한 건 그런 거니까.
ㅅ..... 사...ㄹ ㅏ...ㅇ... 흐...... 좋아한다 선풍기야!!!
에어컨이 너 엄청 부러워해.
나랑 직접 터치하잖아.
감사한 줄 알아.
(큰소리 한번 내봤어 이번만 봐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