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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비밀은 아니지만,

카카오톡 생일 숨기기

by 진작

24 절기가 어느 순간 어긋나기 시작한 이유는 환경의 파괴 때문일지. 내가 나이를 먹게 되어 찾아온 여러 가지 변화들의 기분 탓인 건지. 알 수 없지만 오묘하게 맞아떨어져 가는 올해의 절기. 며칠 전 입추라더니 콧방귀를 뀌며 들어오는 가을을 문전박대하던 스스로가 미안해질지경. 매번 속아 넘어간 입춘과 입추의 배신감에 그랬던 거니 너무 속상 해하지 말길. 하지만 이번만큼은 진짜 가을이 들어온 것 같으니 반갑게 인사해 주도록.


카카오톡에는 매달 생일인 친구들의 목록이 뜨곤 한다. 가끔 말로만 축하해 주기 애매한 관계들 속에 고민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혹여나 나 같은 사람이 있진 않을까 싶어 부랴부랴 올해가 시작되기 전 카카오톡에서 내 생일 숨기기를 눌렀다. 방법은 간단하다.


fasas.jpg 안드로이드 기준. 카카오톡 생일 숨기기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작년보다 적은 축하를 받았다. 그렇다고 전혀 슬프거나 속상하진 않다. 그만큼 나도 의무적으로 챙겨야 했던 오고 가는 선물들을 생략해도 되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속이 좀 편안해졌다랄까?


하지만 저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는 씁쓸함이란, 참... (절대 슬프지 않음)(절대 속상하지 않음)(절대 편안함)

그럼에도 기억해 주고 축하해 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괜히 진짜 내 사람들을 남겨놓은 느낌. 그렇다고 연락이 안온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홀해지거나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도 참 인간인지라 챙겨준 사람들에게 더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그렇게 생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중 고마운 것은 절기가 맞아떨어진 날씨. 매년 여름생일이라 불운하다 생각했지만, 문득 또 한 번 생각해 보면 이 더운 여름 이 큰 몸을 낳으시려 얼마나 고생하셨을 엄마의 인내와 마음을 생각하니 여름생일이라는 투정 따위 하찮게 느껴질 정도. 다시 한번 엄마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서 말했던 절기 맞춰 찾아온 입추 다운 나름 시원한 날씨. 폭염의 연속이었던 올여름에 비집고 들어온 입추는 선선하고 높은 하늘을 살며시 들이밀고 생일 축하를 해주었다. 입추가 지나 생일을 맞이하니 괜스레 가을을 선물 받은 느낌. 그 누가 계절을 선물로 받겠는가. 감사하고 또 감사한 올해의 생일. ( )


나이가 하나하나 들어갈수록 생일에 무뎌지는 건 나뿐인 걸까. 최대한 무던하게, 그렇지만 내면에선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아직 순수한 마음이 꽁꽁 숨겨져 있는 나는 애써 손사래를 치며 '생일 뭐 별 건가-' 하며 세상 시크하게 하루를 보냈다. 우울한 기분도 기쁜 기분도 왔다 갔다 하며 이 모든 기분들을 날려버리기 위해 무리해 가면서까지 저녁러닝을 하고 마무리했었더랬지. 모쪼록 특별하고 싶었던 생일은 이렇게 끝이 났다. 다시 돌아올 생일이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2025년의 나의 생일이.


사느라 고생이 많다.

생일 축하한다 나여-

지난 생일을 자축으로 마무리.




가을이 제일 좋아
시원하고 또 시원하고 계속 시원해서.
그저 시원해서.
나는 시원한 게 제일 좋은가 봐.
가을이 좋았던 게 아니라 시원한 걸 좋아하나 봐.
시원했을 여름의 순간도 좋아해 보려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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