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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작 Mar 25. 2022

아이러니한 것

산에서 웃통 벗고 날 뛴 사람

몇 년 전이었을까. 여권이라는 것을 처음 만든 날.

그날, 외국을 처음 가게 될 거라는 기대로 가득 찼던 날.

놀랄 것 까진 없지만, 놀랍게도 나는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외국여행에 대한 로망도 꿈도 없었던 나였기에 여권이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외 촬영을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갑자기 없던 로망도 꿈도 봄 되면 새싹 피어나듯 봉긋-하게 올라왔다. 본업을 살려 촬영도 하고 겸사겸사 여행도 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첫 경험이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먹는 것도 숙소도 해결될 뿐만 아니라 돈 까지 받아가며 머나먼 새로운 세상 구경까지. 급하게 여권을 만들기 위해 연락받은 당일 날부터 부랴부랴-사진을 찍고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여권이 나오기 까지, 고작 수첩 같은 통행증을 간절히 기다리며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간절함을 절절히 흡수하고 있었다. 며칠 후 여권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 그 나라의 기후환경부터 관광지까지. 이미 나는 평소답지 않게 가보지도 못한 나라에 대한 공부 열정을 마구마구- 분출하고 있었다.


출국 몇 주 전이었을까. 해외 촬영자 명단이 대폭 줄어들었단다. 물론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그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제작진 측에서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다음에 다른 기회에 또 연락드리겠다며 안녕을 고했다. 함께 명단에 올랐던 형과 망연자실 실실- 웃으며 쓰디쓴 커피를 마시면서 애써 위로하며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첫 해외여행...? 아니,

나의 첫 콜럼버스 되어보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며칠 전, 「시즌2」가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어왔고 주변 지인들은 농담 삼아 이번에도 지원해보라는 말과 함께 그때 추억을 되새김질을 하며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 잔의 커피를 다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그 소식을 인터넷에 찾아보기 시작했고, 소문대로 공지가 존재했다. 그때 쓰디쓴 커피를 함께 마셨던 형에게 물었다.


"형 이거 지원하실 거예요?"


형은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싫어. 두 번은 당하고 싶지 않아."


단언컨대, 이 형을 10년 넘게 알아왔지만 이렇게 단호한 건 처음이었다. 마치 내 질문을 예상이나 한 듯.


주변 몇몇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물어봤다. 물론 다들 알고 있는 소식이었지만 따로 지원을 준비하거나 생각조차 하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시즌1」 촬영 때 몇몇 배우들과 촬영진들에게 그 작품에 대한 나쁜 소문이 많이 돌았기 때문에 그도 그런 반응들이 나올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조차도 고민이 되었다. 미운 마음에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시즌1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고민이라고 했지만 이미 영상을 찾아보는 순간부터 나는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몇 시간 동안 분석을 끝내고 마감전까지 제출하기 위해 대사와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공고문에는 제출해야 하는 영상의 제한시간과 용량을 제시해주었고, 그 보다 더 눈에 띄는 한 줄이 있었다.


'최대한 과감한 도전을 원합니다.'

'최대한 과감한 도전을 원합니다...'

'최대한 과감한 도전을 원합니다.......?'

'최대한 과감한 도전을 원합니다..!?'


최대한 과감한 도전이라.

년 전 급하게 만든 여권보다 더 과감한 도전이란, 무엇일까. 살면서 필요 없을 것 같았던 여권이란 걸 만든 과감함보다 더 한 것이라니...


일단 자주 가는 산 공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모르니 인적이 드문 이른 아침시간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올랐다. 다행히도 다 뜨지 못한 해의 시간이었기에 사람들의 이른 산행은 없었다. 봄은 봄인가 보더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해는 빨리 떠올랐고 날은 생각보다 많이 밝았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웃통을 벗었다.

바지까지 벗지 못했지만,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과감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하는 거지만, 나는 지극히 평범한 무명배우이다. 카메라를 돌리고 무용과 무술을 섞은 동작들을 1분간 여러 번을 반복해서 담아냈다. 봄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추웠다. 그 보다 더 추웠던 건, 아무렇지 않게 내 뒤에서 턱걸이를 하시던 어르신. 그 눈빛이 더 추웠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보고 계셨을까...

아, 지극히 평범하다고 했었던가. 조금 바꿔야겠다. 평범하지만 가끔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샘솟을 때가 있다.

그걸 나는 '용기'라고 말하지만, 오랜 나의 친구들은 '돌+아이'라고 말하긴 하더라. 하지만 투철한 준법정신에 입각하며 사회의 도덕성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식적 용기라 생각하기에. 나는 지금까지도 평범하지만 용기 있는 무명배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몇 시간을 여러 장면을 찍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담아뒀던 영상들을 편집하는 내내 실소가 터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저장하는 순간에는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게 준비과정부터 촬영까지의 이야기를 해줬다

그들은 이불도 뒤집어쓰지 않은 채 핸드폰을 너머 옆에 있는 듯한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말을 던졌다.


"너 그러다 붙을 것 같은데?"


"어?"


아이러니하다. 난 붙으려고 한 것이다.

아이러니하면서도 이상하다. 나는 분명 붙길 바란다. 하지만 붙으면 고민이 많아질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붙길 바란다. 산에서 신발과 상의를 탈의하며 자유연기를 펼친 과감성에 보람이란 걸 선사해주고 싶기도 했다.


이미 내 손을 떠나 버린 지원 영상이 타고 타서 그 들의 선택에 손에 놓인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한낮 무명배우가 간절하게 바랄 수 있는 거라곤 합격 소식이거늘. 이전의 나쁜 소문들에 주변 사람들의 걱정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무리 아이러니 한 상황에 아이러니 한 기분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붙었으면 좋겠다.




무심하게 슬쩍슬쩍- 바라보던 아저씨의 눈빛은 차가움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도 사는구나라고 바라보는 따뜻함이었길.
그런 눈빛이었길. 나는 바라본다.


「촬영을 끝내고 살짝 온 현타 온 무명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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