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다른 이를 설득할 자신이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아주 어린 시절, 나는 환경미화원을 꿈꿨다. 초등학교 1-2학년때였던가, 학교를 마치고 귀갓길에 사탕껍질을 바닥에 버리는 친구를 모질게 나무란 적(지금 와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꼬맹이가 '모질게' '나무란 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데미지가 있었을까 의아스럽지만)이 있었다. 왜 사탕껍질을 '지구'에 버리냐며 폭풍우 같은 분노를 쏟은 후 난 친구의 사탕껍질을 내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나의 호주머니에는 늘 거리에 버려졌던 쓰레기들이 들어 있곤 했다.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기억하는 것은 나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환경에 민감했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환경미화원의 장래희망을 가진 나에게 당시의 담임선생님은 보다 큰 꿈인 환경운동가의 꿈을 심어주셨다. 그리고 그 이후 난 한동안 열성적으로 환경운동가가 되기를 꿈꿨다.
비록 이후, 환경운동가의 꿈이 크게 구체화되지 못했고 중학생이 되고 난 이후에는 그 마저도 사라져 꿈이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학생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환경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내 인식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에는 동물권 운동 단체에 가입을 해 한동안 활동을 하기도 했었고 때때로 환경에 관련된 이슈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면 맹렬하게 달려들어 관심을 갖고 파헤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성향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사실, 내가 환경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겁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일련의 행위가 언젠가 인류를 자멸하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친구의 사탕껍질을 호주머니에 쑤셔넣던 그 날에서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말이다.
최근 며칠 전, 기록적인 폭우로 중국 허난성과 서유럽이 물난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관련 자료들을 뒤져보았다. 허난성에서는 지하철 선로에 물이 차 수십명 이상이 익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불어나는 물에 휩쓸리는 등 지금까지 사망한 사람의 수가 수백에 달한다 들었다. 서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일에서만 14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고 벨기에에서도 스무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 독일의 한 도시 같은 경우는, 폭우로 인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심지어 이들 지역의 폭우로 인한 피해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집을 잃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집계될지 알 수 없다.
얼마 전, 독일에 있는 독일인 친구 한명과 sns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기록적인 폭우 때문에 독일이 난리라고 하던데 너 사는 곳은 좀 괜찮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응 다행히 괜찮아. 나는 사실 홍수 이런건 못사는 나라에서만 국한되는 일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좀 많이 놀랐어. 이러다 진짜 세상이 망하려나 봐." (사실 나는 독일을 포함한 서구사회를 제외한 국가들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도대체 한 국가의 경제적인 지표와 지정학적인 환경 요소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의 말투에는 늘 무언가 우월함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 글과는 상관없는 주제이니 일축하도록 하자.)
나는 부디 그의 마지막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세상이 멸망하기 위한 징조'로서의 홍수 및 폭우가 아니라 '그냥... 그냥 폭우 ㅎㅎ..'이기를 바란다. 사망자 및 피해자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이러한 재해상황이 '인류가 지구를 망침으로서 발생한 필연적인 재앙의 전조'가 아니라 '그저 우연히 발생한 운이 나빴던 자연재해'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미 너무나도 많은 지표들이 이것은 단순히 우연한 재해가 아니라 말한다.
만약 지구가 자정의 기회를 완전히 놓치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종국에는 지구가 인류를 포함한 대다수의 생물에게 거주가 불가능한 곳이 되면 어떻게 하지? 만약 그리된다면 출구는 없을 것이다. 종착지는 죽음 뿐이다. 이것이 내가 환경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두려움이다.
그리하여 내 망상은 하나의 디스토피아이다. 모두가 공평하게 죽음으로 향하는 거대한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