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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Apr 11. 2021

내게 상처 준 사람을 대면해야 할까요?

도움이 되기도, 되지 않기도 하는 대면

기억하라. 사실은 사실이다. 당신 주변의 거짓말쟁이들이 입막음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든.
 —빌리 차일디시(Billy Childish), <나의 잘못(My Fault)>


어느 정신과 의사의 유튜브 영상을 보다 보니 부모에게서 입은 상처를 부모와 직접 대면하여 풀어야 하는지 설명하는 장면이 있었다. 설명의 요지는, 상처를 해소하는 데에는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에 스스로 타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이 중요할 뿐, 부모의 사과나 관계 개선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게다가 대면을 해 보았자 상대방은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다르게 기억하거나, 자신만의 입장을 내세우며 변명을 하고, 사과를 한다 해도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의 경우에도 상대방의 반응이 그랬다. 오래도록 지속된 자신의 언행을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만의 입장을 내세웠으며, 사과를 하여도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난 너를 창피해 한 적이 없어."

"네 몸에 멍이 들도록 내가 때렸다고? 어머, 심장이 벌렁거린다, 얘."

"내가 아픈 너한테 욕을 했다고? 나도 힘이 드니 그랬겠지."


더불어 "너는 남보다도 못한 가족"이라는 비난과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만큼 돈 들여 공부시켰겠느냐"는 물질적인 생색,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모함, "과거에 집착이 심하다"는 폄하, "어느 부모가 자식의 따돌림을 두고 보겠느냐"는 교묘한 반문('그러니까 어느 부모도 안 하는 짓을 당신들이 한 것'이라고 답해주려다 관두었다)까지. 온갖 가스라이팅(gaslighting: 피해자가 사건에 대한 스스로의 기억과 인지 내용에 의구심을 품도록 심리를 조작하는 행위)으로 인해 상처의 치유에는 역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언행이 나의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확신을 얻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멀찍이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고. 


상대의 반응을 지레짐작하여 감정을 표현조차 않고 일방적으로 거리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한다면 싫을 것 같다. 상대와 거리를 두기 전에 대면하는 일은 상대에 대한 예의이자, 내 마음에게도 최선인 일이었다.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행동 방향을 결정했으니 스스로도 '할 만큼 했구나,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 말 들어서 나쁠 거 하나 없어."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거 하나 없어."

"조상의 지혜, 옛 것이 최고야."


부모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니, 부모가 되고 나니 대체 무슨 자신감에서 그런 말들을 하며 사셨나 싶다.


부모 말 들어서 나쁠 거 없다고? 중대한 순간에만 겨우 한 마디 던지는 부모들에게는 해당될 수 있겠으나, 사사건건 자식을 트집 잡으며 군림하는 부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거 없다고? 모든 역사와 사회가 한결같다면 그럴 수 있겠으나, 우주의 삼라만상은 끝없이 변하고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옛 것이 최고라고? 사람을 노비로 삼고 과학을 천시하던 조선시대의 옛 것? 대통령이 헌법을 파괴하고 삼권을 장악하던 독재정권의 옛 것? 선생이 학생을 개 패듯이 패던 쌍팔년도의 옛 것? 어떤 옛 것? 어떤 조상?


삼강오륜. 장유유서. 어른 공경. 오랜 가치를 이용하여 몇몇 어른들은 자신의 위치를 평가절상하고 자신의 시대를 미화해 왔다. 게다가 나쁜 기억을 스스로 망각해 버리는 인간 두뇌의 작용까지 더해져, 그들은 지난 과오를 기억도 못하고, 인정도 안 하고, 권위만 칭송 받으려 한다. 일부의 경우 자신에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젊은이를 버릇 없고, 싸가지 없고, 은혜도 모르는 막장으로 몰고 가는 재주까지 있다. 오늘날의 조직에서 그런 어른이 리더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조직원을 탓하며 비난과 고함으로 공포감을 조성하고 나이와 직위로 군림하는 리더. 조직원의 충고나 반발에도 자신의 언행을 반추하지 못하는 리더. 개별 프로젝트에 조언을 구하는 조직원에게 "네가 좀 알아서 하라"며 성가셔하는 리더. 그 와중에 어떻게든 성장을 지속하는 조직원들을 보며 그게 다 나의 가르침과 은혜 덕이라고 으스대는 리더. 이런 리더는 일찍이 퇴출각이다.


나는 나의 자식에게 그런 리더가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리더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피폐해져 나의 일과 가정에 소홀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들의 나르시시즘이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못할 때, 그만큼이나 그들이 약해져 있을 때, 나는 비로소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그들을 돌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타라 웨스트오버(Tara Westover), <배움의 발견(Educated)>


덧. 상처를 궁극적으로 치유하려면 부모와 맺지 못한 애착 관계를 누군가와 안정적으로 맺어야 한다. 

치유적 인간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경우에 특히 중요하다. 강력한 사회적 연결은 (중략)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좋은 방법이다. 친구와 연인이 대리 애착 대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관계를 맺도록 기회를 만들고... -대니얼 키팅, <남보다 불안한 사람들>

쉽게 말해 '귀인'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 남편과 아이가 그 역할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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