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 Apr 06. 2021

보조했으니 보조자로 남을래요

자식의 인생에서 주인공 노릇은 제발 그만

대학교 때 심리학 시간에 가정 주부의 우울증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자식이 성년이 되고 빈 집에 줄곧 혼자 남는 주부들은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는데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고 하소연한다고 한다. 그렇게 우울증에 빠진 주부의 자식들을 상담하면 그들은 "나도 내 인생이 힘든데, 나도 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한다고 한다. 대학생이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양쪽 다 모두 이해가 간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이를 먹어 주부 생활을 하고 나니 이젠 자식 쪽만 이해가 간다.




가사 노동이 어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자주 거론되는데 첫 번째는 잘하면 티가 안 나지만 못하면 티가 난다는 것, 둘째는 새벽부터 한밤까지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사는 통역일과 비슷하다. 두 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는 회의에서 별다른 사고 없이 모든 순서를 마쳤다면 통역사도 공이 크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응당 실제 연사들에게 쏠린다. 통역사는 그 관심이 자신 쪽으로 분산되길 원하면 안 된다. 마치 연사의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막후에서 머리를 굴려야 한다. 그 결과 회의가 물 흐르듯 흘러갔다면 잘 된 거다. 티 나지 않는 통역사는 잘하는 통역사다.


어떤 회의에는 통역 부스가 있다. 통역사는 부스 속으로 쏙 들어가 내내 그 속에서 이야기하므로 더더욱 티가 안 난다. 리시버를 귀에 낀 청중이 '통역이 어디에 있나' 궁금해서 두리번거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연사의 얼굴에 집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청중의 태반이 부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면? 통역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뭐라고? 뭔 말이야... 이해가 안 되는데?'

'왜 아무 소리도 안 나지? 뭐가 잘못됐나?'


잘하면 티가 안 나고, 못하면 티가 난다.


둘째로, 새벽부터 한밤까지 일이 끝나지 않는다. 통역을 앞두고 통역사는 클라이언트로부터 각종 자료를 전달 받는다. 회의 주최 기관에 대한 정보, 회의를 하는 배경, 회의에서 다룰 내용, 회의에서 사용할 PPT 슬라이드, 회의 참석자의 약력 등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방대한 자료를 전달 받고 통역사는 공부를 한다. 정작 회의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갈지는 예측할 수 없기에 별별 시나리오를 떠올려가며 깊숙히 공부한다. 새벽부터 한밤까지 회의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번역도 마찬가지.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딱 들어맞는 도착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텍스트 생각을 한다. 새벽부터 한밤까지 일이 끝나지 않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가사 노동은 금전적인 보상이 없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주부들은 결핍된 보상을 가족의 관심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주부는 막후의 통역사와 같다. 자꾸 주변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자꾸 무대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면 탈이 난다. 저녁 식탁에서 배우자의 머릿속은 일 생각으로, 아이의 머릿속은 학교 생각으로 가득한데,


"이 미역국 있지, 한 시간 넘게 끓인 거야. 저번엔 참기름을 썼는데 이번엔 들기름을 썼고, 고기는 마트에서 유기농 한우를 세일하길래 샀는데, 어때? 맛있지? 괜찮지? 아휴, 아까 마트에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북적대서 혼났네. 계산 기다리다가 다리 아파 죽는 줄 알았어."


이런 이야기는 식구들이 한숨 돌리고 나서,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비워졌을 때, 당신에게 관심 줄 여유가 생겼을 때에 털어놓아도 된다. 주부는 하루 종일 혼자 있어 관심이 필요할지 몰라도, 식구들은 밖에서 사람들에 치이다 와서 관심 줄 여유가 없고, 관심을 줘봤자 뜻뜨미지근하다. 그런 식구들에게 따뜻한 식사와 깔끔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일이고, 오늘도 나의 일을 무탈히 해내어 하루가 잘 흘러갔다는 소소한 위안에서 주부들은 보상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부들에게 희생과 헌신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위험하다. 내가 타인을 위해 희생했다고 믿으면, 내가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믿을 때보다 보상 심리가 훨씬 커진다. 보상 심리가 커지면 주변 사람에게 매달린다. 날 좀 알아 달라고, 왜 이렇게 관심이 없냐고, 왜 고마운 줄 모르냐고. 그러다 마음 약해진 자식이 역성을 들어주면 점차 자식의 인생에서 제 비중을 늘려가는 부모도 있다. 종국엔 자식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인 양, 주인공 노릇까지 하려 든다.




영화 <보이후드>에서 이혼의 반복을 겪으며 혼자 두 아이를 키운 어머니는 둘째 메이슨이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는 날 눈물을 흘린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네가 떠날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신이 나서 갈 줄은 몰랐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애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 학위 따고 원하던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너도 대학에 보내고...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영화 말미에서 메이슨은 대학 친구들과 함께 하이킹을 떠나고, 언덕에 앉아 절경을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을 붙잡으라는 말(Seize the moment)과 함께, 역으로 순간이 지금 우리를 붙잡는다(The moment seizes us)는 말을 한다.


부모로서의 삶도, 주부로서의 삶도, 직업인으로서의 삶도 순간을 붙잡아야 하고, 순간에 붙잡힌다. 순간 이후의 무언가를 바라면 우울하다. 헌신, 희생, 보답 같은 말은 뭔가 더 있으리라 기대하게 만들고, 기대는 줄곧 좌절이 된다.


미역국이 보글거리는 소리,
단단한 사과의 촉감,
반듯하게 개어진 수건,
하얗게 빛나는 욕실 타일,
훌쩍 자란 아이의 키,
곤히 잠든 남편의 얼굴,


소소한 순간에서 커다란 위안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행복할  아는 삶을 나도  아이도 살기를 바란다.


덧. 유명 배우의 아내로서 동시통역사라 자칭하는 L모씨가 있다. L씨는 2014년 데이비드 베컴이 내한했을 때 '베컴 통역'으로 화제가 되었고, 이후 방송 출연을 통해서도 스스로 에피소드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당시 베컴 통역은 따로 있었다. 행사장 구석 작은 부스 안에 내 대학원 선배가 있었다. L씨는 무대 위 베컴 옆에 서서 행사를 진행했을 뿐, 진짜 통역은 부스 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갔다. 행사 이후 L씨가 언론의 관심을 받을 때에도 진짜 통역사는 여전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몇 년이 흘러 L씨는 토리 버치 통역을 처참하게 망쳤다. 관련 영상을 보니, 주인공을 위한 보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선을 넘고 나선다. 그러니 탈이 난다.


by Jin


이전 25화 고맙다고 말해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