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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Mar 20. 2020

이 시국에 종이컵이 어때서요

서운할 것까지 있나요

벌써 스무여 해 전, 초등학교 시절 점심 도시락을 남겨오면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다. 그래서 세 시 반에 하교를 하면 남긴 도시락을 부리나케 꾸역꾸역 먹고는 했다. 네 시 반 내지는 다섯 시에 엄마가 퇴근을 하여 도시락을 확인할 테니. 중학교 때는 급식이 하도 맛없어서 도시락을 싸 다니는 친구가 많았는데 어느 달은 나도 급식 신청을 하지 않았다. 참다 참다, 그리고 주변 아이들이 "그냥 너도 같이 도시락 먹자"라고 하길래 신청하지 않았더랬다. 그날 저녁 이 사실을 알렸더니 엄마는 이렇게 역정을 냈다.


"그럼 엄만 어떡하라고!"


엄마는 다시 급식 신청을 하라고 하였으나 나는 이제 와 변경은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엄마의 짜증 섞인 도시락을 먹고 다음 달에 곧바로 급식으로 복귀하였다.


이제 나는 매일 아침 내 아이의 도시락을 싼다(아, 코로나19로 인해 원격 수업이 진행되는 요 며칠은 아니지만). 미국에 있는 아이의 학교는 급식을 제공하긴 하나 정작 급식을 이용하는 인원은 25인 학급에 대여섯 명뿐이다. 급식 신청도 월 단위가 아니라 매일 아침 선생님이 "오늘 급식 먹을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하고 인원을 확인하여 시스템에 입력한다. 나는 아침에 교실에서 프린트물을 정리하는 봉사활동을 하는데 그때마다 이 과정을 지켜본 바, 하루 급식 인원은 한 반에 대여섯 명 정도구나, 하는 통계가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나머지 스무 쌍의 학부모가 급식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우리 부부의 경우엔 이렇다.


메뉴가 한정적이다. 주로 햄버거, 핫도그, 피자, 치킨, 타코의 연속이다. 그런 음식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건강에 해로우리라고 믿지는 않지만 도시락을 싸준다면 과일과 채소를 팍팍 넣고 더욱 다양한 고퀄리티의 음식을 먹일 수 있는데 뭐하러 굳이 급식을... 하는 생각이다.

쓰레기 배출이 어마어마하다. 학교 점심시간에 저학년의 쓰레기 분리 배출을 지도하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쓰레기통 앞에 서서 우유팩은 재활용, 냅킨과 음식물 쓰레기는 퇴비용(compost) 쓰레기통에 올바로 버릴 수 있도록 저학년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도와주는 역할이었는데 대부분의 쓰레기가 급식에서 기인했다. 점심시간은 먹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노는 시간이기도 하다. 놀기 위해 음식을 잔뜩 남기고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이 귀엽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늘어가는 쓰레기를 보고 있노라니 사뭇 심란하였다(이건 아이들에게 책임을 묻을 일은 아니다). 반면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은 배출할 쓰레기가 별로 없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서 식사를 하고 남은 음식은 그대로 뚜껑을 닫아 집으로 집으로 가져가면 되니까. 나의 경우 아이가 남겨온 점심은 다시 볶거나 구워서 저녁에 먹는다.

초코 우유가 나온다! 매일 흰 우유 또는 초코 우유 중 하나를 선택하여 배식 받을 수 있는데 우리 아이는 흰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초코 우유를 고를 터. 아이의 치아 건강에 유독 과민한 나는 아이가 초코 우유를 마시고 양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괜스레 불안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매일 아침 아이의 도시락을 싼다. 전혀 번거롭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오래 전 내 엄마처럼 "그럼 엄만 어떡하라고!" 하며 좌절할 만큼 미치게 번거롭지도 않다.


오늘 아침, 그동안 밀린 한국 뉴스를 읽었다. 그 중 한 뉴스에 기가 차서 이렇게 서두가 긴 글을 쓴다. 코로나19로 인한 긴급 돌봄교실에서 식기를 지참하지 않은 아이들이 종이컵에 밥과 국을 배식 받아 먹었다고 한다. 내가 기가 찬 부분은 학부모가 이 사실에 불만을 품었고 이 일이 결국 기사화되어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식기를 가져오지 않아 종이컵에라도 배식해주었는데 그것이 어째서 불만인지? 이런 시국에 이런 일을 기사화하여 논란을 초래할 만큼이나 급식이 절체절명의 문제인지? 하도 궁금하여 관련 기사를 몇 건 더 찾아보았다.


논란이 된 학교는 원래 돌봄교실에 급식을 제공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급식을 원하는 학부모들의 항의가 거세었다. 개인적으론 이 부분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평생도 아니고 한정된 기간 동안만 도시락을 준비해 달라는데 그것이 목소리를 높일 만큼 절대로 못해 먹을 중노동인가? 아니 그보다도, 어떤 시국에서든 반드시, 아무런 차질 없이 급식을 제공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것이 학교 측에 있기나 한가? 어찌 됐든 학교 측은 학부모의 항의를 받아들이고 정부의 지원 제도에 따라 뒤늦게 급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위생을 위하여 개별 식기 지참을 요청하였는데 이 공지가 모든 학부모에게 직접 전해지진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식기를 지참하지 않은 몇몇 아이들이 종이컵에 음식을 배식 받아 먹었다.


인터뷰에서 해당 학부모는 죄책감이 든다면서 "이렇게까지 학교를 보내야 하냐"고 했다. 대체 죄책감이 들 이유가 무엇인가? 맞벌이이므로 아이를 돌봄교실에 맡기었고, 식기 지참에 대한 공지를 받지 못하여 아이를 빈손으로 보내었으며, 아이는 식기가 없으니 종이컵에 밥을 받아 먹었다. 이 중 대체 어느 대목에서 엄마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 아이가 배불리 먹지 못해서? 초등생은 유아가 아니다. 이렇게 전 세계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선 인간의 실수로 공지사항이 누락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엄마가 식기를 챙겨주지 못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내가 종이컵에 밥을 받아 먹어 저녁 식사 때까지 배가 좀 출출할 수도 있다는 거, 몸소 체험해 봐도 괜찮은 나이다. 위기 상황에서 그 정도의 불편도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 정도의 불편에 대해서도 항의하고 제보하여 일을 키워야 한다면, 그렇게 아이들이 무(無)관용을 보고 배운다면, 그 아이들은 자라서 타인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결국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실수 투성이인 인간들로 가득한 이 불확실한 세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아이가 밥을 배불리 먹지 못했다고 말해올 때,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 부모의 마음은 이해한다.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 아이의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응하는 것도 부모의 일이지만,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도 부모의 일이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 타인의 실수로 내가 불편해질 수도 있다는 거, 나 역시 실수하는 존재라는 거,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거, 어쩌지 못해도 무던히 안고 갈 수 있다는 거, 때로는 그냥 서로 안고 가야 한다는 거. 그것을 배우며 자란 아이들이 행복할까,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 행복할까? 답은 너무 뻔하다.


인터뷰에 등장한 학부모도 당연히 답을 알고 있을 테다. 그저 상황이 혼란스러워 판단에 실수가 있었겠지.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일을 기사화하여 보도한 방송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전염병이 창궐하는 통에 아이를 어딘가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카오스 그 자체일 터. 돌봄교실을 운영하기 위해 출근하는 교사들의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사족이지만 미국의 경우, 적어도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돌봄교실 같은 것은 운영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직장이 재택근무로 전환되었고 식료품점과 (치과 같은 곳은 문을 닫았지만) 병원, 일부 관공서, 몇몇 음식점(단, 주문은 테이크아웃에 한정)만이 문을 열었으므로 돌봄교실에 대한 수요가 있어 봤자 얼마나 있을까 싶다. 허나 수요가 어떻든 간에, 한국과 달리 코로나19 진단 역량이 부족하므로 애초에 감염되지 말아 달라는 취지에서 6피트(약 1.8미터) 이상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력히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아이들을 한 공간에 모으는 돌봄교실은 이 곳 상식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부 지정 학교는 문을 열었다. 저소득층 학생에게 무료 급식을 지속 제공하기 위해서. 문을 닫은 학교 소속의 학생들도 지정 학교에서 무료 급식을 먹을 수 있도록 교육청에서 전체 안내 메일을 발송하였다. 급식이 절체절명의 문제가 되는, "우리는 어쩌라고요!" 하고 따질 만한 때는 바로 이런 때다. 급식이 없으면 아이가 밥을 쫄쫄 굶을 수밖에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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