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1.75번 변한 후의 재시험
지금으로부터 열여덟 해 전, 2002년 11월 6일, 나는 수능 시험장에 시계를 지참하지 않았다. '시계를 가져가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긴 하였으므로, 지참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지참하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테다. 시계를 지참하지 않은 이유는 교실에 벽시계가 있으리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치른 어떤 시험에서도 벽시계가 없는 시험장은 없었으므로 수능 시험장에도 당연히 벽시계가 있을 줄 알았다.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나는 당시 재학 중이던 여고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교실에 들어서자 같은 학교 동급생들과, 재수를 위해 모교를 찾은 선배들, 그리고 누구인지 모를 응시자들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뜻 깨기 힘든 정적이 흐르고 있었지만 나는 벽시계에 대한 의문을 즉각 해소해야 했으므로 교실 반대편에 앉은 같은 반 친구에게 소리 높여 물었다.
"여기 시계 없어?"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고, 친구는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모르는 얼굴이 내게 말했다.
"너, 담임 어디 있는지 알아?"
초면인 걸로 보아 같은 학교 동급생은 아니고, 초면에 반말인 걸로 보아 같은 학교 선배인 것 같았다.
"네."
"그럼 담임한테 가서 달라고 해. 빨리 뛰어."
그래서 뛰었다. 담임 선생님은 불과 5분 전에 교문에서 마주친 바, 도로 교문으로 달려가 보니 다행히 아직도 교문에서 수험생들을 맞아 주고 계셨다. 나는 달려가며 외쳤다.
"선생님, 시계가 없어요!"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서 "미쳤어, 미쳤어!"하고 등짝을 후려 맞은 일이 여러 번 있었기에 이번에도 "미쳤어, 미쳤어!"하며 등짝을 맞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뭐! 시계!"하고 단말마를 지르시더니 내 손을 얼른 붙들고 '수능 대박'과 같은 플래카드를 든 후배들 무리에게로 달려가셨다. 그리고 절박하게 외치셨다.
"시계 있는 사람! 시계 있는 사람 나와 봐!"
그러자 어떤 아이가 "저요!"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이 외치셨다.
"그래, 그것 좀 빌려 줘!"
"네?"
"그것 좀 빌려 달라고! 여기 선배가 시계를 안 갖고 왔대!"
그러자 그 애가 이렇게 되물었다.
"근데 이거 커플 시계인데요?"
후배들이 온통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심각한 얼굴은 담임 선생님뿐이었다.
"커플 시계고 뭐고 빨리 내놔! 돌려줄 거니까!"
그 말에 후배는 손목에서 커플 시계를 풀어 바로 건네 주었다.
금색 케이스에 진녹색 스트랩이 달린 커플 손목시계. 언어영역 시험지 곁, 책상 한 구석을 차지한 그 시계가 나는 굉장히 신경 쓰였다.
잃어버리면 어쩌지?
망가뜨리면 어쩌지?
아, 근데 그 후배, 몇 학년 몇 반 이름이 뭐였더라?
후배의 이름을 상기하고 다시 문제를 풀었다.
문제마다 답이 두 개인 것 같은데. 나만 그런가?
잃어버리거나 망가지면 내가 도로 사 줘야 하나?
근데 커플 시계잖아. 똑같은 걸 못 구하면 남자친구 것까지 새로 사 줘야 하나?
두 가지 후보 답안 중에 정답을 고르고자 나는 읽은 지문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도 시계에 대한 잡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평소에도 잡념이 많았으니까. 잡념이 많으므로 평소에도 독해가 느렸으니까. 친구들은 내게 책을 잘 읽는다고 하였지만 사실 나는 책을 잘 읽는다기보다는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상념에 잘 집중할 뿐이었다. 어떤 구절에서 무언가가 떠오르면 한참 그 생각에 집중한 후에야 다시 텍스트로 돌아왔으므로 10분 동안 같은 페이지를 들여다 보며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건 아무리 봐도 답이 두 갠데. 이 문제는 버려야 하나?
근데 시계를 돌려줄 때 뭔가 감사의 선물이라도 해야 하나?
...... 해야겠지?
같은 지문을 몇 번 읽다가 스물스물 졸음이 몰려 왔다. 그래도 위기감은 여전히 느끼지 못했다. 평소에 모의고사를 볼 때에도 많이 졸렸으니까. 고3이 된 순간부터 매일 반복되는 문제 풀이가 지긋지긋하면서도 기왕 하는 거 열심히 풀어 보자는 생각으로 임하였는데 그런 양가감정 자체가 두뇌를 지치게 하는지, 열심히 풀어 볼라치면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당시 약도 먹고 있었다. '생리를 늦추는 약'이라며 어머니가 수능을 앞두고 매일 약을 주셨는데, 당시 나는 오로지 생리 지연만을 위한 정식 약품이 존재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 약이 실은 피임약이었고 피임약은 복용 초기에 두통, 오심 등의 부작용이 있음을 십수 년이 흐른 후에야 알았다.
잠을 깨어 보고자 나는 앞사람의 등을 보았다. 함부로 고개를 돌리지는 못하여 주변 시야로 흐릿하게 들어오는 다른 응시생들과 감독 선생님의 얼굴도 보았다. 수능이라는 시험에 대해 각기 다른 크기의 부담과 욕심을 안고 있을 사람들이 이렇게 한 공간에 모여 같은 시험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답이 두 개인 것 같은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 날이 어떻게 지나가느냐에 따라 이 모든 애들의 삶이 다르게 그려지리라는 사실이 무언가 억울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오늘로 이런 시험은 정말 끝인가?
망치면 어떻게 될까?
... 이미 망쳤나...?
마침내 위기감을 느낀 것은 시험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문제를 절반밖에 풀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나서였다. 이런 경우 모의고사에는 평소에 익숙한 지문이 출제되어 쉽게 찍기도 하였는데 수능에서는 온통 처음 보는 지문뿐이었다.
무슨 지문이 한 페이지 전체람?
이게 관촌수필이라고? 아니, 내가 아는 관촌수필은... 내가 아는 관촌수필은 뭐였더라?
지문도 아니고 보기까지 왜 이리 길어? 아, 진짜 지긋지긋해서 진짜.
열여덟 해의 생애 가장 중요하다는 시험에서 나는 생애 가장 많은 문제를 가장 쌩으로 찍었다.
얼마 후 받아든 성적표의 언어영역 점수는 원점수 120점 만점에 92점, 3등급이었다. 과거 모의고사에서 2등급을 맞아본 적은 있지만 3등급은 또 난생 처음이었다. 난생 처음 맞은 최저 등급이 수능에서라니.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게 대체 어쩔 작정이냐며 "미쳤어, 미쳤어!"하고 정답게 등짝을 후려쳐 주셨다.
본래 지망하던 Y대는 언어영역에 가중치를 부여하였기에 지원해 보지도 못했고, 대신 수리영역과 외국어영역에 가중치를 부과한 K대에 입학하였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기들이 수능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내 언어영역 점수를 공개해 보았다. 점수를 듣고 한 동기는 일순 얼굴이 굳어지더니 K대에 대체 어떻게 들어 왔느냐고 물었다. 그냥 나머지 영역을 잘 봐서 들어왔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그가 "아!"하고 외쳤다.
"너 집이 강원도지? 너 농어촌 전형이구나!"
나는 강원도 출신은 맞으나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인 C시 출신이므로 농어촌 전형은 쓸래야 쓸 수 없었다.
그만큼 나의 언어영역 점수는 일반적인 K대생의 표준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었다.
K대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평생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짱짱한 교환학생 프로그램 덕분에 K대 등록금으로 1년 간 해외 대학을 다녔고,
여기 저기 발에 채이는 도서관 덕분에 아무 때나 아무 데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그 도서관들 안에서 지금의 남편과 수많은 시간을 데이트하였다.
이 모든 추억이 K대가 아니었더라면 사라졌거나 변형되었을 텐데도 나는 가끔씩 떠올렸다.
최악의 점수를 수능에서 받다니.
대입 결과에 불만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수능에 질척거리는 미련은 오랫동안 불가사의한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아이와 남편과 집콕을 하며 재능 기부로 번역을 하던 어느 날, 왜 나는 10년째 번역을 하여도 영어와 한국어가 이리도 어려울까, 라는 고민에 겹쳐 문득 미련의 이유가 떠올랐다.
나는 언어영역을 잘하고 싶었던 거다. 영어와 더불어 국어는 나의 최대 관심 분야였으니까. 독해가 느리고 잡념이 많다 해도 최악의 점수는 받고 싶지 않았던 거다. 게다가 커플 시계에 피임약에 무언가 탓할 만한 외부요인들까지 있었으니 해소되지 않은 억울함이 있었던 거다. 대입에 실패했더라면 언어영역의 패인을 진작에 분석했을 텐데, 운 좋게 대입에는 성공하였으니 분석이고 나발이고 앞만 보고 살다가 마음 속에 찝찝한 미련만 질척질척 남아 있었던 거다.
그래서 언어영역을 다시 풀어 보았다. 이번엔 2020학년도 버전으로. 2020학년도 수능 언어영역은 더 이상 언영역이 아니라 국어영역이었다. 시험 시간은 90분에서 80분으로, 문항 수는 60문항에서 50문항으로 줄어 있었다. 17.5년, 그러니까 강산이 1.75번 변한 후에 치르는 재시험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78점, 인터넷에서 등급컷을 검색해 보니 17.5년 전과 똑같이 3등급이었다. 이번에도 뒤쪽에 위치한 지문 세 개는 아예 읽지를 못했고 찍은 문제는 모조리 틀렸다. 또 이번에도 정답이 두 개인 것 같은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해당 지문을 두 번이나 다시 훑었다. 풀이하는 동안 자꾸 잡념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래아를 사용하는 고문학은 교과서에서 출제해야 하지 않나? 미리 배우지 않으면 이 많은 고어의 뜻을 어찌 다 아나?
이 지문은 좀 재밌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왜 자꾸 애를 때린담?
아, 90년대에도 주산 학원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지. 그 애는 어찌 살고 있을까? 맞다, 고등학교 때 L양이 그 애를 좋아했던가? L양이 맞나?
문제를 푸는 중간 중간 딸아이가 다가와서 제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남편은 그 동안 문제 풀이 연습이 없었고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므로 결과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하였지만 글쎄.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연습이 없었기에 예전보다 즐겁게 풀이하였고, 아이와 대화를 나눈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머릿속도 맑고 기분도 좋았다. 게다가 예전에는 문제와 보기를 먼저 읽은 다음 지문을 읽으면 편리하다는 요령조차 몰라서 무작정 지문부터 꼼꼼히 읽었는데, 이번엔 요령대로 문제와 보기부터 먼저 읽고 지문을 읽었다. 새로운 요령을 적용하는 일이 재미있긴 해도 풀이 시간은 크게 단축되지 않는 듯하다. 궁극적으로 지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는 건 매한가지니까. 헷갈릴 때마다 같은 지문을 여러 번 읽는 것도 매한가지고.
원인은 커플 시계도, 피임약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잡념이 많아서 느리고 산만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풀이한 문제는 대부분 맞추었으니 풀이 속도가 문제일 뿐, 풀이 결과는 다행히 양호했다. 속도는 평가를 위한 여러 가지 정당한 척도 중 하나. 학생 때는 그 척도로 우열이 가려졌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내 속도와 남의 속도를 인정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금융공학에 대한 문서를 번역하며 원문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는 나의 속도를 인정하고,
1/4이 두 개면 1/2이 된다는 사실을 형광등처럼 깜빡이고나서야 이해하는 아이의 속도를 인정하는 일.
숙제를 하다가 자꾸만 딴 짓을 하는 아이를 인정하는 일.
날 닮아서 느리려니.
날 닮아서 상념이 많으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내는 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일.
느리고 산만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유년의 나까지 따뜻하게 바라보는 일.
덧1. 커플 시계는 2-3천원짜리 과자 한 통과 함께 무사히 돌려주었다.
덧2. 담임한테 빨리 뛰어가라고 말해 준 선배는 몇 달 후 K대에서 신입생으로 다시 만났다. (보고 싶어요, 언니.)
덧3. 대학 2학년 때 다시 찾아간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가 Y대를 가기 위해 재수를 하러 올 줄 알았다고 하셨다. (다녀 보니 K대도 좋더라고요, 선생님.)
덧4. 수능 시험장에 벽시계가 없는 이유는 시계 고장으로 인한 수험생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