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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May 28. 2020

정의하지 말아 주세요

가족이 씌우는 프레임의 마수

ㅣ'Frame'은 동사로

(거짓 증거로) 죄[누명]을 뒤집어 씌우다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다


"우리 아이는 주의가 산만해요."

"우리 아이는 게을러요."

"우리 아이는 숫자 감각이 없어요."


자녀를 이렇게 표현하는 부모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정말로 산만한지, 정말로 게으른지, 정말로 수 감각이 없는지 정의하는 기준이 무엇이지? 객관적인 기준이 있대도 아이가 산만하거나 게으르거나 수 감각이 없는 것이 아이의 내재적인 문제인지 어찌 알지? 아이를 그렇게 만드는 외부 요인이 도처에 도사리는데도 모르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가 내 아이는 어떤 아이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글씨 쓰기가 아직 서툴러 자꾸 지웠다 쓰기를 반복한다고 해서 '덤벙댄다'고 정의할 수도 없고, 타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다고 해서 '차분하다'고 정의할 수도 없다. 집에서 인형 놀이를 즐긴다고 해서 '여성스럽다'고 정의할 수도 없고, 점심 시간마다 남자애들과 축구를 한다고 해서 '선머슴 같다'고 정의할 수도 없다. 이렇게 양면성이 많다고 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고, 웬만해선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예측 가능한 아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다. 나의 얄팍한 지능으로 정의하기엔 너무도 복잡한 아이다.



ㅣ게으른 이가 게으른 이에게


아이가 두 돌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하루 종일 밖에서 함께 논 적이 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마자 동네 산책을 하고 놀이터에서 뛰어 놀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서는 키즈 카페에 가고 싶다고 하여 당시 올림픽 공원에 있던 '딸기가 좋아'라는 실내 놀이터에 가기로 했다. 아이는 아직 두 돌이라 매일 낮잠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당시 거주하던 풍납동에서 올림픽 공원까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로 천천히 걸었다. 아이를 유모차에서 잠시 재울 요량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는 조용했고, 햇빛 가리개를 씌운 유모차도 별다른 움직임 없이 잠잠했다. 아침부터 정신 없이 놀았으니 피곤했겠지, 하고 아이의 자는 모습을 확인하려 햇빛 가리개를 살며시 들춘 순간, 나는 의외의 장면을 맞닥뜨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 것이다.


이 아이는 자다 깬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잠들지 못한 것인가? 아이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애초에 잠들지 못하였으리라 결론 지었다. 당시 아이의 낮잠 시간은 주로 한 시간 남짓이었으므로, 유모차에 탑승한 지 30-40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기상해 있을 리 만무했다. 


공원을 좀 산책하며 다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아이는 눈 앞에 펼쳐진 공원의 자태에 잔뜩 설렌 양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함박 미소를 짓다가 유모차에서 내려 달라며 양팔을 뻗어 왔다.


낮잠은 글렀다.


키즈 카페에서 두 시간을 꽉 채워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유모차에서도 아이는 잠들지 않았다. 아이가 잠든 것은 저녁 밥상에서였다. 아이는 밥알을 씹으며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 새엔가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놓았는데 요즘도 그 영상을 이따금 재생해 본다.


영상 속에서 아이는 색색의 반찬이 담긴 노란 식판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솜솜."


내 목소리가 아이의 태명을 부른다. 아이가 눈을 뜬다. 나와 마주치자 배시시 웃다가 이내 미간을 찡그리고 칭얼거린다.


"밥은 그만 먹을까?"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만 먹자."


영상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그날 급히 저녁상을 치우고 아이를 씻겨 재운 기억이 난다. 반면 이후로 내가 무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아이가 남긴 저녁밥을 먹고 설거지와 청소를 한 뒤, 야근하는 남편을 만나지도 못한 채 잠에 들었겠지.


그로부터 며칠 후에 친정 부모님께서 방문하셨다. 여느 때처럼 평일 오후에 아무런 사전 연락 없이 직접 우리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러서 열고 들어오셨다(부모님과 최소한의 선도 긋지 않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아이스 박스 가득 싸 오신 반찬을 냉장고에 꽉꽉 넣어 놓고는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먹던 중에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동영상에서 아이가 왜 졸고 있었느냐고.


나는 그 영상을 부모님께 전송한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휴대폰으로 촬영한 모든 사진과 동영상을 네이버 클라우드에 자동 업로드하고 있었는데 (최소한의 선도 그을 줄 몰랐던 터라) 부모님의 요청으로 해당 폴더를 공유하고 있었다. 바로 그 폴더에 액세스하고 동영상을 시청하신 것이다.


나는 아이가 하루 종일 밖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지 못하여 저녁상에서 졸았다고 답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늦잠 자서 그런 게 아니고? 딱 보니 네가 늦잠을 자서 애가 내내 혼자 놀다가 뒤늦게 아침상을 받고 피곤해서 잠들어 버린 거 같던데. 아니냐? 딱 보니 뻔하던데, 뭐."


내게 항상 게으름뱅이 프레임을 씌우는 아버지는 역설적이게도 나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게을렀던 사람이셨다. 고등학교 체육 교사였던 아버지는 퇴근 후에 저녁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면 곧장 텔레비전 앞에 드러누우셨고(그렇게 가만히 있어야 소화가 잘 된다고 하셨다), 주말에도 식사 시간이나 청소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텔레비전 앞에 누워 계셨다. 주말 나들이 같은 것은 드물었다. 일요일까지 집에서 쭉 쉬어야 월요병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다 그 자리에 그대로 요를 깔고 그대로 누워 밤잠을 주무셨고 새벽이 되어 잠에서 깨면 그 자리에서 아침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출근을 하셨다. 출근을 해서는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기가 귀찮아 일 년 내내 번호를 부르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부지런하다고 자부하셨다. 사람의 근면성은 손에 나타나 있다면서. 당신은 손가락 끝이 뭉툭하고 손톱이 짤막한 부지런한 손이고, 내 손은 길쭉길쭉 게으른 손이라면서.


가난하여 고생했던 유년의 기억 때문인지, 운동을 전공하며 몸을 굴렸던 기억 때문인지, 아버지는 정작 최근 30년 간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당신을 정의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텔레비전 앞에 누워 배를 두드리며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긴지,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엔 그 시간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길어지는지, 아직도 당신을 부지런하다고 여기는 믿음이 얼마나 엉뚱한지 전혀 모르고 계셨다. 그러므로 평일엔 육아와 가사, 주말엔 번역을 하느라 지친 나머지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아이를 돌보는 딸 자식을 보면서도 "게을러서 꾸미지도 않는다"고 삿대질을 하셨고, 평일엔 야근, 주말엔 육아와 유학 준비에 지쳐 책상이 항상 엉망인 사위에 대해서도 "부부가 똑같이 게으르다"며 혀를 끌끌 차셨다.



ㅣ사실은 수 감각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도형의 넓이 계산 문제를 어머니께 여쭤 보았더니 어머니는 풀어 볼 시도조차 하지 않으시곤 "그런 거 모른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수학을 모른다던 어머니는 내게 숫자 감각이 없다며 중학교 3년 내내 수학 과외를 시키셨는데 사실 수학 과외를 하기 전인 초등학생 시절에도, 수학 과외를 그만둔 고등학생 시절에도 나의 수학 점수는 항상 90점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수학을 하지 못한다는 프레임에 갇혀 버렸고, 대학에 와서는 선배들이 추천하는 회계학 교양 수업을 부담스러워 듣지 않았다. 후에 비즈니스 통역을 하며 필요성을 느끼고 온라인으로 기초 회계와 재무를 배웠는데 짐작과는 달리 상당히 재미있었다. 나는 수학 영재로서의 감각이 없었을 뿐, 일반적인 수 감각까지 없다는 프레임을 쓰고 살 만큼 수를 모르진 않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당신이 쓰고 산 프레임을 다짜고짜 내게 물려주셨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리모콘을 놓지 못하는 당신이 한심하여 그 단점을 자식에게 투영하고 프레임을 씌우셨을지 모르겠다. 그런 어른들은 아이가 프레임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빈정댄다.


"네가 웬일이냐?"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아이들은 '웬일로' 프레임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그저 모든 인간이 그렇듯 어떤 때는 산만하고 어떤 때는 주의 깊고, 어떤 때는 게으르고 어떤 때는 부지런하고, 어떤 때는 셈이 빠르고 어떤 때는 셈이 느린 양면성을 드러냈을 뿐이고, 성장과 함께 변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비아냥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자칫하면,


"이제 우리 딸이 다 컸구나."


와 같은 칭찬조차 조롱으로 듣는다. 나처럼.


어떤 아이들은 부모가 씌운 프레임이 틀린 줄도 모르고 프레임으로 자신을 본다. 내 아이가 식탁에서 조는 영상에 대해 "네가 늦잠 잔 것이 뻔하다"고 아버지가 비꼬았을 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를 방치하고 어찌 늦잠을 자나. 역시 아버지는 육아를 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오죽 게으르면 저러실까' 싶어서 그저 잠자코 있었다. 언젠가 아이의 손톱 밑에 낀 음식물이 아무리 씻겨도 지워지질 않아 손톱을 바짝 깎아 놓았을 때 어머니께서 그 손톱을 보시곤 "애 손톱을 아무 생각 없이 막 깎아 놓았다"고 눈치를 주실 때에도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내가 오죽 생각이 없으면 저러실까' 하고.


그로부터 1년 후,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하여 미국으로 이사를 했고 한국에 가지 않은 지는 이제 4년이 되어 간다. 부모님과 멀어져서 가장 좋은 점은 내게 프레임을 씌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프레임이 희미해진 덕에 나는 내 자신을 재발견하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정의한 대로 게으르거나, 어머니가 정의한 대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깨어 있는 시간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노는 데에 사용한다. 미국에 와 경제 활동을 이어갈 신분이 되지 못하자 재능 기부 형태로 번역일도 계속 하고 있다. 텔레비전 앞에 가만히 앉아 오락물을 보는 건 아이와 함께 만화를 시청하는 토요일과 일요일, 각각 한 시간씩뿐이다. 어쩌다 남편이 한국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싶어하면 아이를 재우고 시청하기도 하지만 그런 날은 일주일에 한 번이나 될까? 남편 역시 텔레비전 시청은 아직 사치인, 나보다 훨씬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둘이 똑같이 게으르다"며 아버지에게 손가락질 받던 우리는 사실 흘러가는 시간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여 자꾸만 할 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다. 

ㅣ밸런스가 딱 괜찮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원격 수업이 한창인 요즘, 공부하는 아이를 곁에서 지켜 보고 있노라면 아이가 글씨를 참 막 쓴다 싶다. 단어를 쓸 때보다 문장을 쓸 때 특히 더 그런데, 막 쓰다 보니 자꾸만 틀리고, 그래서 지웠다가 썼다가, 다시 지웠다가 썼다가, 반복하다 보면 간혹 과제물이 찢어지기도 한다.


'글씨 참 못 쓴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기도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한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기도 벅찬데, 설상가상으로 과제물까지 찢어지고 난리인 마당에 엄마라는 사람이 고작 한다는 말이 "너 글씨 참 못 쓴다"라면 아이의 기분이 어떻겠나. 게다가 가끔은 차분히 예쁘게 쓰기도 하므로 글씨를 못 쓴다고 단언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악필이다. 아이 아빠는 더욱 심한 악필이고. 그래서 그냥 "괜찮다"고만 말해 주었더니 아이는 괜찮지가 않단다. 그래서 그러면 좀 천천히 써 보라고 하였다.


며칠 천천히 쓰는 듯하더니 다시 제자리다. 옆에서 관찰해 보니 생각의 속도만큼 쓰는 속도를 재촉하느라 실수가 잦다. 매일 지우개를 붙들고 종이와 씨름하며 아이는 이미 고충을 겪고 있다. 그런 와중에 '악필이다,' '성급하다,' '덤벙댄다'라고 프레임을 씌우고 확대경을 들이대며 아이의 고충을 한층 커다랗게 키울 필요는 없다. 


가끔은 명필일 때도, 차분할 때도, 느릴 때도 있으니까 지금 이대로도 밸런스가 딱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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