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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Jul 11. 2020

어른이니까 책임을 집시다

"약속했잖아!"하는 어른들

l 아기는 죄가 없는데


나는 신생아 때 모유를 두 달만 먹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TV에서 모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리고 내가 출산을 하고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에도 줄곧 이런 말을 하셨다.


"나는 너 때문에 모유수유 못한 거야. 배고프다고 어찌나 울어대든지. 계속하다가는 네 성질을 버리겠더라고. 너 위해서 그만둔 거야, 모유수유. 네가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아니?"


그러니까 어머니의 논리에 따르면 당신께서 모유수유를 하지 못하신 것은 나의 책임이고, 나의 '성질' 보호를 위해 모유수유를 관두어 주신 어머니께 나는 감사해야 한다. 나는 내 아이를 낳아 모유수유를 하며 기르는 동안에도 어머니의 말을 그러려니 하며 그럭저럭 믿었더랬다. 그리고 내 아이가 30개월 간의 모유수유를 끝내고 수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어머니의 말씀이 책임 회피였음을 깨닫느다.


내 아이도 신생아 때에 배고프다고 많이도 울었다. 한 시간마다 젖을 물리며 아이도 나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이는 젖병을 물려 보았자 얼마 먹지 못하고 뱉어내었다. 이 때 아이를 젖병에 적응시키느냐, 또는 산모의 모유량을 늘리느냐는 전적으로 아이의 부모가 선택할 문제이다. 제 3자가 모종의 압력을 넣더라도 그 압력에 따르느냐 마느냐 역시 부모의 선택이다. 내 경우에도 어머니로부터 압력이 있었다. 한사코 거부하는데도 굳이 산후조리를 해 주시겠다고 부득부득 서울에 올라와 계셨던 어머니는 내가 모유수유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것 봐, 못 한다니깐. 넌 못 해. 엄마도 못 했어."


하시며 도대체가 도와 주러 오신 건지 훼방하러 오신 건지 헷갈리게 하셨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필사적으로 모유량을 늘려 결국은 완전 모유수유를 하였다. 어떤 선택을 하든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답안은 없었을 테다. 그저 그 순간 나와 아이에게 최적이라 판단되는 선택을 내릴 뿐. 그리고 그 선택으로 부작용이 발생한다면 그 또한 부모인 내가 책임져야 했을 것이다. 책임지는 일을 겁낼 필요는 없다. 인생은 본디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고 온통 책임질 일들 투성이이므로. 


어머니의 경우 서른 몇 해 전 포기하신 모유수유의 부작용은 당신 혼자서 겪으셨다. 모유수유의 장점이 보도될 때마다 홀로 죄책감을 느끼신 것이다. 그랬기에 아무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데도 괜히 스스로 나서셔서 자기 방어를 하셨다. 나는 아이를 위해 수유를 그만두었다고. 아이가 모유를 먹지 못한 건 뱃구레가 크게 태어난 아이 본인의 탓이라고.


당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그렇게 신생아에게 전가하셨다.





ㅣ일방적인 약속의 책임은 어른에게


아래의 상황은 아이의 책임일까, 부모의 책임일까?


장소는 장난감 가게. 아이가 인형을 사 달라고 떼를 쓴다. 그러자 부모가 거래를 제안한다.


"이따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 사 줄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스크림이고 뭐고 당장은 인형이 갖고 싶으므로. 그렇게 인형을 손에 넣은 아이는 장난감 가게를 나서자 마자 바로 맞은편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하고는 도로 떼를 쓴다.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그러자 부모가 답한다.


"안 먹기로 했잖아. 약속을 지켜야지."


아이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이에 부모는 분통을 터뜨린다.


"약속했잖아!"


아이들은 눈앞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아직 어리니까.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하지만 부모는 어른이다. 어른으로서 부모는 아이에게 거래를 제안하기에 앞서 아이가 거래를 이해하고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 감안할 책임이 있다. 아직 약속을 이행할 능력이 없는 아이에게 약속을 시켜 놓고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부모가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약속했잖아!" 하고 윽박지르는 대신 아이를 토닥이며 더 이상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피하기만 하여도 아이는 약속에 대해 충분히 배웠으리라.



ㅣ하양이와 까망이에게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을 졸라 십자매 한 쌍을 길렀다. 한 마리는 하얗고, 다른 한 마리는 짙은 갈색이어서 이름은 하양이, 까망이라 불렀다. 하양이와 까망이를 처음 구입할 때에도 거래 조건이 있었다. 새를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내가 도맡고, 새장은 베란다에 두어야 하며, 집 안으로는 절대 들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나는 한동안 새장 청소를 열심히 하며 약속을 지켰다. 어머니께서도 약속을 지키셨다. 새를 돌보는 일은 조금도 거들지 않으셨고 새들을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으심으로써 굳게 약속을 지키셨다. 반면 아버지는 약속을 어기셨다. 아버지는 새장 청소를 함께 해 주셨고, 청소 도중 새장 밖으로 날아간 하양이와 까망이를 대신 잡아 주셨다. 


그러다 어느 날 나도 약속을 어기고 만다. 겨울이 되어 새들이 베란다의 추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저대로 두면 다 죽는다, 는 아버지의 설득에 어머니는 새장을 집 안으로 들이는 데에 동의하셨다. 새털이 거실에서 날리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욕설을 하며 새털을 주우셨다.


하양이와 까망이는 이듬해에 알을 낳아 일곱 식구가 되었지만 그 해 겨울엔 어머니께서 새장을 집 안에 들이기를 반대하시어 하양이가 얼어 죽고 말았다. 죽음이 있은 후에야 새장을 집 안으로 들여 한 철을 보낸 뒤 나는 아버지께 새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친구 댁으로 새들을 보내셨는데 그곳에서 새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하양이와 까망이를 떠올릴 때마다, 새장을 집 안으로 들이도록 허락해 준 어머니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부모가 된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작은 십자매가 한파의 베란다에서 살지 못하리란 것을 어른이 부모님께서도 과연 미처 모르셨을까? 두 번째 겨울엔 하양이가 동사할 때까지 바깥에 방치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가 동물을 홀로 돌보도록 어른이 방치하는 일은 과연 윤리적인가?


어머니의 의사 결정과 그에 따른 행동은 동물 학대였다. 애완동물을 구입하기 전 거래 조건이 무엇이었든 어머니는 동물 학대를 피할 선택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하기보단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하는 편이 교육적으로도 나았을 테다. 게다가 피양육자가 동물을 홀로 돌보도록 방치하다 동물이 죽음에 이르자 "약속했잖아"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건, 법적으론 어떨지 모르겠으나 엄마가 된 지금의 내 시점에선 아동에 대한 정서적 학대이기도 하다.


학대의 부작용은 부메랑이 되어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어머니는 자식이 사랑하는 동물을 함께 돌보며 정서적으로 교류할 값진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치고 마셨다. 그리고 그 동물에게 욕설을 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함으로써 자녀와의 정서적 단절을 스스로 악화시키셨다. 동물과 아동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저조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어머니께서 고작 "새 새끼들"이라고 부르던 존재가 그런 여파를 일으키리라곤 상상조차 못하셨을 테다.


나는 하양이, 까망이와 그 애들의 아기들을 좋아했다. 중학교 1, 2학년 때에 부모님도 새들도 잠든 시간에 공부를 하다 보면 어둠이 무섭곤 했다. 그 때 위로가 된 것은 집 안에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보송보송한 새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새들이 나를 떠나 보내진 곳에서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기를 스물 두 해가 지난 지금에서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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