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라고 거절하는 일에 대한 오랜 실패
어릴 적 자주 맡겨지던 이웃집이 있다. 그곳엔 남매가 있었는데 여자아이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고 남자아이는 나와 동갑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을 S양과 S군, 또는 S남매라 칭하겠다. S남매는 텃세가 상당하여 나를 줄곧 따돌렸다. 과자가 생기면 보란 듯이 둘이서만 먹었고, 놀이 중에도 갈등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내가 배제되었다. 갈등이 없더라도 내 차례는 언제나 꼴찌여야 해서 다른 아이가 뒤늦게 놀이에 합류해도 그 아이의 순서가 먼져여야 했다. S남매의 어머니(이 글에서는 '아주머니'라고 부르겠다)는 자식들을 꾸짖긴 하셨으나 강하게 개입하진 않으셨다. 특히 S양의 고집과 기세에는 아주머니도 밀리는 구석이 있었다. 한 번은 S남매의 집에서 나의 부모님까지 모여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S남매는 내 부모님이 계심에도 눈치를 보지 않고 여전히 나를 떠돌렸다. 그리고 내가 울음을 터뜨리자 S양은 희한하게도 그 사실을 나의 어머니에게 일렀다.
"아줌마, Jin이 울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답하셨다.
"또? 울라 그래, 그냥!"
어머니의 대답은 나를 따돌려도 별 상관 없다는, 계속 따돌려도 괜찮다는 결정적인 승인과도 같았다. S남매는 그렇게 가끔 나타나는 나의 보호자마저 허수아비 취급하며 나를 따돌릴 수 있었다. 한 번은 하교 후에 몸이 아팠다. 아주머니는 나를 S양의 침대에 뉘었다. 뒤늦게 하교한 S양은 제 침대에 누운 나를 보고 "얘가 왜 내 침대에 누워 있냐"며 벌컥 화를 내었다. 그러곤 침대 옆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면서 내내 툴툴대었다. 당시 나는 구토감이 있어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신 죽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도 S양은 "기껏 만들어 줬더니 먹지도 않는다"며 비난과 신경질을 이어갔다. 그렇게 비몽사몽 간에 욕을 먹으며 눈치를 보는 와중에 어머니께서 퇴근하여 나를 데리러 오셨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다시 한 번 욕을 먹었다. 네가 아파 봤자 얼마나 아프다고, 아프단 말을 저 집에서 왜 자꾸 하느냐고.
그러던 어느 해 가을, S남매의 아버지('아저씨'라 부르도록 하겠다)가 돌아가시고 이듬해에 아주머니와 남매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면서 나는 더 이상 그 집에 맡겨지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아저씨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내게 다정했던 분이셨기에 슬프기는 하였으나 눈물이 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나와 같이 만 10세였던 S군조차 장례식장을 해맑게 뛰어다니고 있었으니, 아직은 너무 어린 나이였나 보다. 그 날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친구 분이 내게 물으셨다.
"Jin이 혹시 울었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려는 찰나,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이셨다.
"울더라고! 아까 절하면서 보니까 펑펑 울더라고!"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 "아이고, 그랬어? Jin이도 다 컸구나!"하며 칭찬을 하셨다. 참으로 괴이한 거짓말에 괴이한 칭찬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께 거짓말을 한다며 지적을 하고 무안을 주기에는 상황이 애매하였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남의 비위를 맞추고 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 자신감과 안정감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피플플리저(people pleaser)라 한다. 이웃의 비위를 맞추고자 자식이 당하는 따돌림을 내버려둔 어머니, 자식이 이웃의 장례식에서 울었는지 말았는지까지 보기 좋게 포장했던 아버지. 집에서는 자식의 성적에 욕설을 쏟아내고 바깥에서는 “공부는 지가 알아서 해야죠, 뭐"하며 쿨한 척하시던 어머니. 술에 취하면 아들 없는 신세 타령을 하시면서 남들 앞에서는 딸바보인 척 내 손등에 입을 맞추시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부모님의 연기에 매번 장단을 맞추며 체면을 지켜 드린 나까지, 우리는 모두 피플플리저였다. 남에게 미움 받기 두려워서, 남에게 인정 받고 싶어서 피플플리징을 하며 예스맨(yes man)이 된 나는 어느 날 스스로 내 발등과 남의 발등까지 제대로 찍어 버리고 만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시험 기간, <법학통론>이라는 교양과목의 시험을 치르고 교실을 나섰다. 법학엔 일절 관심도 없으면서 선배들이 널럴하다고 추천하여 신청한 과목이었는데, 역시 관심이 없다 보니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답안지는 무슨 정신으로 메웠는지, 대학 공부를 이딴 식으로 해도 되는지, 착잡면서도 멍멍한 마음으로 바깥을 걸었다. 봄이 한창이라 캠퍼스는 아름다웠고, 기분은 꾸리꾸리했고, 내 옆에는 같은 시험을 치고 함께 나온 남자 동기 A군이 있었다. 그런데 A군이 갑자기 고백을 했다. 나를 좋아한다며, 내일 시험이 모두 끝나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나는 내일 B군과 영화를 보기로 했다고 하였다.
A군은 그럼 넌 이제 B군과 잘 되는 거냐며, 거절의 뜻으로 알겠다고 하곤 제 갈 길을 갔다.
나는 B군과 잘 될 마음이 없었다. 단지 A군을 거절하는 데에 'No'라는 말을 하지 못하여 마침 생긴 B군과의 약속을 핑계로 이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B군이 갑자기 고백을 했다. 나는 핑계거리를 찾지 못하여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시험을 마치고는 약속대로 그 애와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자 그 애는 내게 대답을 독촉했다. 나는 계속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고 하였고, 그 애는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하였다. 그 애는 나를 따라오다가 결국 지하철까지 따라서 탔고, 내가 하차할 역이 되자 따라 내리고는 역 안 벤치에 잠시 앉아 이야기를 하자고 하였다. 역시 'No'를 하지 못하여 나는 벤치에 앉고 말았다. 앉아 있는 동안, 나는 그 순간이 현재의 시공에서 똑 떼어져 머나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날아가 버리길 바랐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 그 순간은 전혀 없던 일이 되어 나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길 바랐다. No라고 말할 필요가 없도록. 하지만 현재의 삭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Yes를 말하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B군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손도 잡기 싫어했다. 그런 날이 지속되는데도 나는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다. 싫은 상황을 견디는 것이 No를 말하기보다 쉬웠다. 하지만 B군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어느 날 전화로 이별을 통보해 왔으니까. 통보를 듣는 순간 난감했다.
동기들에게 이 소식을 일일이 전해야 하나?
아니면 잠자코 있어야 하나?
그러다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어쩌지?
그 순간 나는 현재가 시공에서 똑 떼어져 머나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날아가 버리길 바랐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 남에게 설명해야 할 변화 따윈 아무것도 생기지 않은 채로, 괜찮다고 세뇌시켰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기를. 그래서 나는 이별 통보를 거부했으나 거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고 나니 화가 났다.
나는 제가 싫은데도 Yes를 해 줬었는데 그 보답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나? 뭐 이런 경우가 있지?
하지만 몇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나 대신 No를 해 준 B군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애와 내가 명목적으로만 사귀었던 그 시간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삭제되어 없던 일이 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B군은 자꾸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군대에 가고 나서도 미안하다는 편지를 했고, 주변의 동기와 선배들은 은근히 내게 B군의 소식을 전했다. 내게 (지금의 남편이 된) 정식 남자친구가 생기고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까지도 나는 자꾸 B군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B군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찝찝해지는 거였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데 기분이 왜 이렇담? 그 기분은 마음의 신호였다. 내가 모두의 발등을 찍었다고, 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그러니까 다시 발등을 찍지 않으려면 하루 빨리 예스맨 노릇을 관두라는 마음의 신호. 그 신호를 마침내 알아챈 건 몇 년이 지난 후였다.
친구의 영어 레포트를 대신 쓰다가
회사에서 다른 직원의 잡무를 떠맡았다가
상사의 영어 공부를 도와 주다가
나는 화를 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래? 도와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돌이켜보면 나는 그들을 '도와' 준 것이 아니었다. 도와 주었다면 도와 준 것만으로 행복했어야지. 도와 주고선 불만이 없었어야지. 돕기 싫으면 No라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억지로 Yes라 해 놓고 무얼 바랐나.
Jin은 착해.
No하지 않아서 편해.
그래서 나는 Jin이 좋아.
갈등 없이 인정 받고 싶어서 Yes를 했다가 도리어 더 큰 갈등만 일으키길 여러 번. 예스맨, 즉 피플 플리저의 근본적인 니즈(needs)는 남의 인정을 받아 마음이 편해지고 싶은 것이다. 표면적인 용어는 '피플’ 플리저이나 궁극적으로는 자기 마음부터 편하고픈 ‘미(me) 플리저'들이다. <미움 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테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나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인기 많은 연예인도, 존경 받는 지도자도 안티 세력이 있다. 심지어 세계 4대 성인인 예수, 부처, 소크라테스, 공자까지도 비판가가 수두룩 빽빽이다. 그런데도 남들한테 조금도 욕 먹기 싫다면, 그저 Yes라는 말 한 마디로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싶다면 그것은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랑에 목마른 욕심쟁이이자 미움 받을 용기 없는 겁쟁이들. 그리고 그들의 이기적인 피플플리징은 종국에 제 발등을 찍고 만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는 남편과, 하루에도 수십 번 나를 안아 주는 딸아이의 사랑을 몇 년 동안 받고 나자 드디어 미움 받을 용기가 생겼다. 오래 전,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넌 보답해야 해.
내가 저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하니 너도 잘 보여야 해.
하던 문화에서 벗어나서
나는 너를 위해 양보하는 게 좋아.
너는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어.
네게 이만큼 애쓸 수 있어서 행복해.
하는 공식에 젖어든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생긴 용기. 이제 주변의 제안이나 요구가 탐탁지 않으면 두려움 없이 No를 말할 수 있다. 그럴 때에 말하는 No는 내 마음에 대한 Yes이기도 하다.
내 마음에 대한 Yes가 많아질수록 마음의 크기도 자라나는가 보다. 그래서인지 이제 남편의 말이 조금은 공감이 간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는 남편의 말이. 이제야 아주 조금, 공감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