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막이로 안 되겠다. 가을바람 만끽 하나 싶었는데 맛보기만 보여주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가을에게 배신당한 기분이다.
저녁 먹고 소화시킬 겸 학교 운동장에 왔다. 도착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었다. 어느새 차가워진 공기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반 바퀴 걷다가 방향을 틀었다. 입구까지 걸어가다 다시 운동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갈까 말까 고민했다. 일단 한 바퀴 걸어보자 했다.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집으로 가야지 했다. 반팔에 바람막이 하나 걸쳤다. 걷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휴대폰으로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있던 글을 수정하면서 계속 걸었다. 집으로 가면 분명 마무리를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사십 분을 걸었다. 몸이 떨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제 바람막이로는 안될 것 같았다. 늦게 걸을 때는 기모를 입어야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람막이로 충분했는데 어느덧 깊은 가을로 들어섰다. 나도 모르는 사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가을은 겨울의 준비 단계다. 바람막이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몸소 알려주었다. 가을은 배신한 적 없다. 무심하게 왔다가 곧 추워질 테니 겨울을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모른척하고 싶었다. 아직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몸으로 직접 추위를 느껴봐야만 알아차린다. 잠깐의 만남은 여운을 남긴다. 가을 덕분에 겨울을 준비한다. 그런 가을이 고맙다. 하마터면 원망할 뻔했다.
가을은 단호하게 말했다. 겨울을 준비하라고. 지난 계절 그리워만 하지 말고 다음 해야 할 일을 준비해야겠다.
인생도 매 순간 신호를 보낸다. 그걸 알아차릴 수도 있고 무심히 흘려보낼 수도 있다. 가을은 냉정해진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을 더 따뜻하게 준비하라는 따뜻한 신호였다.
저서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