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직장 뒤편 작은 공원으로 나왔다. 인근 고등학교에 있는 여학생 다섯 명이 쪼그리고 앉아 시험점수를 매기고 있었다.시험기간인가 보다.
"한문 22점!", "국어 72야!아오씨발"
시험 점수 이야기하는데 참 살벌하다. 두 명은 신나게 그네를 타고 세명은 여전히 시험지를 뚫어지게 보고있었다.점수 확인을 끝낸친구들은미끄럼틀을 타고 노래도 불렀다. 이 순간만큼은 그저 해맑은 여고생들이었다.
아담한 공원이라 한 바퀴 도는데 2분도 안 걸린다. 그새 여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었고 눈은 핸드폰만 주시했다.
"야 평균 20점 나올 것같아!" 한 학생이 소리쳤다. 풀밭을 유심히 보던 친구는 곤충을 잡은 모양이다. 냅다 들고뛰는데 네 명의 친구가 비명을 지르며 양사방으로흩어졌다.
여고생들을 보고 있으니잠시나마 그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시험 점수가 당장 나의 인생점수인 줄 알았다.미래가 보이지 않으니까. 친구도 가족들도 보이는 점수대로 나를 판단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다.그렇다고 치열하게 공부하여 누구나 원하는 대학을 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갈 수 있는 무난한 대학에 갔다. 딱히 성적 스트레스도 없었던 거 같다. 기대하는 사람도 없고 기대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부모가 되었다. 나의 두 딸이 시험점수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6학년 때100점을 받아오면 나와 다른 유전자를 가진줄 알았다. 중등세계의 점수는 다양했다. 50점을 받아와도 그 이하 점수를 받아와도 단 한 번도 혼낸 적없다.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하고 싶다.답답한 심정도 안다. 이미 결과는 나왔고 받아들이고 부족한 건 본인이 깨달아야 한다.공부가 다가 아니지만 부모가 되어보니 할 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점수에만 연연하는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성적 때문에 딸과의 사이가 틀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공감은 해주되 그 대가는 오로지 딸의 몫이다. 나의 엄마가 그랬듯.
엄마는 이제 명확한 답이 있는 시험은 없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답지 없는대단원의 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결혼 후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문제집을 받았다.두 개의 부록이 들어있다. 이 부록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부록은 자식이고 문제집은 부모다. 총 4단원이 있다.
1단원은 유아기 키우는 시기
2단원은 초, 중 고등학생 키우기
3단원은 성인이 된 자녀 내보내기
4단원은 청춘은 다시 시작된다
몸은 힘들지만 가장 행복했던 1단원을 끝내고 현재 2단원 중간 단계다. 현재 부록과 문제집을 같이 풀고 있다. 부록만 바라보기엔 문제집의 진도가 많이 밀릴 것 같았다. 같이 풀어 나간다. 나의 인생 점수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진다. 3단원부터는 좀 쉬웠으면 좋겠다. 4단원은 나만 아는 정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시험 점수가 미래를 결정짓는 인생 점수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시험 점수는 학교에서 채점하지만 인생 점수는 나만이 매길 수 있다. 내가 나를 잘 알아주지 못하고 방황하면 시험지에 비가 온다. 어려운 문제는 고치고 또 고쳐서 내 것으로 만들어 간다. 아직도 풀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결국 답은 독서다. 나에게 맞는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내가 오늘 한 일의 결과는미래에 나온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 기쁘고 설레는 감정이 뒤엉켜 크고 작게 나타난다. 마흔이 넘으니 조금 알 것 같다. 마냥 꽃길만은 없다는 것을. 나의 두 딸이 꽃길만 걷길 바라지 않는다. 좌절도 해보고 너무 기뻐 세상을 다 얻는 기분도 만끽해 봤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나에게 왔을 때처럼. 나는 옆에서 같이 울어주고 웃어주고 싶다. 거저 얻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 더 소중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