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성해나...

그 남자는 왜 뒤로 걷기를 선택했을까

by 김지나

취미란에 ‘독서’라고 써왔던 건, 딱히 취미라는 것의 개념을 몰라서였긴 한데, 지금 와서 보니 내 취미가 독서인 건 맞다. 더 좁혀 말하면 ‘소설 읽기’다. 한국소설은 잘 안 읽는다. 안 읽기도 하고, 못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최근에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를 샀다. 베스트셀러 같은 책은 수십 년 만에 구매한다. 청년들이 어느 지점에서 공감하는지 동시대인으로서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일단 책 만듦새는 맘에 들지 않았다. 작은 판형에 헐렁하게 들어간 글자들의 조합. 여백도 많고 줄간도 길어 한 페이지에 몇 자나 들어가려나. 글 잘 못 읽는 세태의 반영이라지만, 너무 헐거워 오히려 가독률이 떨어지고,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내용은, 몇 페이지 읽다 멈췄는데 세대 차라는 장벽 때문에 잘 안 읽혀서 일단 보류 상태다. 세대 차, 그거 참 무섭다.


공정한 경쟁 같은 건 없다. 출판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박정민 배우 현상이 편치는 않다. 박정민이 서점을 한다, 박정민이 출판사를 한다, 박정민이 국제도서전에 부스를 차렸다, 박정민이 이 책을 샀다, 저 책을 샀다…. 미디어는 좀 많은가. 유퀴즈에 나와, 유튜브에 나와, 숏폼에 나와, 아주 멀미가 날 정도다. 그렇다고 책과 출판에 대한 박정민의 진심을 비판하는 건 아니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나도 이 문구가 불러온 현상에 기대 책을 샀지만, 솔직히 웃기는 장난 같다. 세상이 왕관 씌우기 놀이터 같기도 하고. 베스트셀러를 둘러싼 책 동네의 호들갑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듯, 나 또한 시종일관 그 호들갑이 영 꼴불견이다. 내가 출판으로 돈을 잘 못 버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군, 싶다.


다시 돌아와서, 나는 소설 읽기가 취미다. 현재 독서 중인 책 중에, 소설만 따져보면, 《대망》(시리즈 전체가 30권쯤 되려나)은 3권에 접어들었다. 《안나까레리나》는 1권을 읽고 너무 통속적이어서 실망을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2권을 거의 다 읽어간다. 톨스토이가 정말 대중적인 작가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가 우매한(?) 민중을 이해시키기 위해 민속 우화를 발굴해 소재로 삼아 자신의 바람직한 생각을 민중들에게 퍼뜨리려 노력한 계몽적 마인드의 소유자인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재미없었다.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소설을 제대로 안 읽어서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마음 먹고 책을 샀는데, 톨스토이의 이 기세가 《안나까레리나》에서도 여전한 측면이 있다. 결혼한 여자와 미혼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그 뻔한 전형을 너무 솜씨 있게 그려내 감탄하게 만든다.


톨스토이의 목소리를 대변한 인물은 레빈이다. 관료사회에 대해 회의하며, 노동과 토지와 자연의 힘을 믿는 시골의 삶을 선택한 귀족 레빈. 당시 러시아의 현실이 당위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알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사회에 혁명의 파고가 높던 때였던 걸 감안하면, 톨스토이의 관점은 어떤 점에서 지극히 무난하다. 무엇보다도 일반 대중 위에 서 있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문학적 성취가 얼마나 위대하든, 내가 톨스토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명확해졌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 뒤로 걷는 남자 토마스가 떠올랐다


운동에 대해 꾸준히 관심이 있었지만, 지금만큼 꾸준했던 적은 없었다. 매일 새벽 6킬로미터 정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중간중간 느리게 뛰고 있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여서 뛰는 코스는 생략했다. 황금연휴 내내 코박고 마감을 했고, 휴일 없이 월요일을 맞아 계속 일을 하다보니 피로가 먼지처럼 쌓였던 모양이다. 오늘은 새벽 산책쯤이라고 생각하며,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는 새벽 하늘을 잠시잠시 올려다보며 걷기 시작했다. 옅은 분홍빛 하늘 속에 숨어 있던 수줍은 태양이 금세 빛을 뿌리며 천하를 호령할 것이다.


오늘은 하천을 걷다가 갑자기 《포르투갈의 높은 산》 1부 주인공, 토마스가 생각났다. 어린 자식과 아내와 아버지를 일주일 새 잃은 토마스는, 그날 이후 ‘뒤로 걷기’ 시작한다. 뒤로 걷는 남자….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기묘한 인물이 등장해 조금 거리감도 느끼고 낯선 부분도 있었지만, 소설은 끊임없이 묵직하고 깊은 생각을 계속 유도한다. 그래서 소설의 여운이 꽤 깊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파이 이야기》로 유명한 얀 마텔의 작품이다. ‘그는 왜 뒤로 걷기를 선택했을까.’ 신과 운명에 대한 반항으로 해석될 법하다. 나는 왜 갑자기 뒤로 걷는 토마스가 떠오른 걸까. 뒤로 걸으면 급히 걷지 못하니 속도를 완만히 할 수 있다고 잠시 생각한 것 같다. 소설의 주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다.


새벽 운동을 마치고 아침 일기를 썼다. 내가 스스로 나의 일상에 가속도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해서 무작정 덤벼들지 말고, 차근차근, 내가 순간순간 무얼하고 있는지 인지하며 해나가자고. 그리고 적당히 ‘멈춤’ 영역도 만들어두자고.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3부다. 다음은 밑줄긋기 한 대목이다. 3부의 주인공 피터는 캐나다 상원의원인데 아내를 떠나보낸 후 도시와 정치, 인간생활에 환멸을 느껴, 침팬지 ‘오도’와 고향인 포트투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얀 마텔은 침팬지 오도를 보는 피터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과 동물의 우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오도가 죽 끓이기 같은 간단한 인간의 기술을 터득한 반면, 피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려운 동물의 기술을 익혔다. 그는 시간이라는 경주에서 족쇄를 풀고 시간 자체를 음미하는 법을 배웠다. 피터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오도는 바로 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처음에 그는 한눈을 팔고 싶었다.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 머릿속으로 같은 영화를 돌려보고, 후회하고 조바심치며 잃어버린 행복을 갈망하곤 했다. 하지만 강변에 앉아 빛나는 휴식의 상태에 젖는 데 점점 익숙해진다. 그러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오도가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가 오도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놀랍다.” _《포르투갈의 높은 산》


오늘의 글은 전개도 흐지부지, 마무리도 흐지부지다. 내가 성해나의 《혼모노》를 못 읽듯, 다음 세대들은 톨스토이의 《안나까레리나》를 읽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이 매우 아쉽지만, 뒤로 걷는 토마스를 떠올린 덕에 오늘 하루는 편히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독서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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