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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May 25. 2016

자부심 강한, 당당한,
매력적인... 그녀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 여성 화가가 불가능한 시대의 행운아

여성이 화가의 삶을 살기란 불가능에 가깝던 18세기 유럽. 아름답고 재능 넘치는 프랑스 소녀 하나가 당당히 화가의 길을 걸어낸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는가 하면, 유럽 왕족과 귀족으로부터 초상화 주문이 쇄도했던 것. 자부심 강한, 당당한, 매력적인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은 그런 점에서 행운아다.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가 어여뻐 그림 속으로 절로 빠져든다. 소녀의 표정은 당당하다. 부끄러움에 물든 홍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소녀는 붓을 들었다. 발레화를 신은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아름다운 풍광 속을 걷는 것도, 거울 앞에서 한껏 치장중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제목이 <자화상>이니, 어여쁜 소녀는 화가가 된 모양이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화, 100×81cm.


    누구의 어떤 작품을 오늘의 얘깃거리로 삼을까 자료를 뒤적뒤적하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정지모드다.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 낯선 이름이다. 화사한 색감, 안정된 구도, 버젓한 표정. 오드리 햅번 사진을 볼 때와 같은 그런 느낌? 너무 예쁘고, 너무 아름답다. 예술적 정취나 미술적 담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이 아름다운 소녀가 어떤 화가로 성장했는지 궁금해졌다.


⋁여성 화가가 불가능하던 시대의 행운아

18세기에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해도, 여성이 화가가 되기 어려웠다. 좋은 가문의 처자가 거리를 활보하는 걸 보고도 말이 많았고, 남성 모델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미술 아카데미와 같은 공식적인 교육을 받는 것도 금지되던 시대였다. 여성문학가가 남성의 필명으로 활동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울프의 가정은 이것이다. 그래, 좋다. 셰익스피어와 동일한 재능을 가진 여동생이 있다 치자. 그녀 역시 오빠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문학적, 지적 담론을 즐기며, 작업자들과 뒤엉켜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모험과 패기로 가득한 그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물론 울프의 결론은 아니다, 였다. 제한된 사회적 관습에 꽁꽁 묶여 재능이 도태되거나, 재능을 열매 맺기는커녕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을 거라는 얘기다.

<밀집 모자를 쓴 자화상>, 1782, 98×70cm.

    엘리자베스 르브룅(Ellizabeth Vigee Le Brun, 1755~1842)이 살던 시대도 비슷했지만, 그녀는 화가가 되었다. 어여쁜 소녀가 아름다운 여성화가로 성장해간 것이다(<밀집 모자를 쓴 자화상>.) 그림 속 미모의 여성은 밀짚모자에 격식 없는 옷차림이다(물론 지금과 비교해보면 충분히 격식 있지만). 맑은 눈빛은 흐트러짐 없이 정면을 응시한다. 왼손엔 파레트와 붓이 들려 있다. 투명한 하늘, 어둠이라곤 모자 아래 드리워진 얕은 그늘뿐. 마리앙투아네트의 공식 초상화가요, 유럽 왕실과 귀족에게 러브콜을 받은 자부심이 그 당당한 태도에 깃들어 있다.

    그녀가 행운아일 수 있었던 데는 분명 집안의 영향 탓도 있다. 아버지는 부셰, 그뢰즈만큼은 아니었지만 미술 아카데미 생 루카의 교수였다. 당연히 이것만으로 화가의 길이 보장될 수는 없었다.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올곧은 신념과 강인한 의지가 있었기에 그 길을 다부지게 걸을 수 있었다. 특히나 데뷔 초기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근거 없는 스캔들에 시달렸고, 사람들은 모델 남성들과의 관계를 흥미로워했다. 혼탁할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일체의 섣부른 행동을 경계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마치 수도사처럼 오로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추구로 허무맹랑한 어지러움에 곁눈질도 주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던 것이다.


⋁앙투아네트 공식 초상화, 여왕의 찬사를 받다

화려하고 섬세한, 엘리자베스의 그림에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드디어 23세, 엘리자베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공식 초상화가가 되었다. 사진기가 없던 시대, 왕가의 결혼을 위해 오간 것도 그림이었고, 귀족들, 왕족들도 자신이나 가족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려 하였다. 초상화가 근대 이전에 회화의 주요 자리를 차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1778년부터 앙투아네트의 공식 초상화가로 활동했는데, 앙투아네트는 <궁정예복을 입은 앙투아네트>를 보고 엘리자베스에게 찬사의 마음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앙투아네트의 신임을 얻었고, 왕비의 초상을 수 점 그렸다. 그중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것은 1783년 살롱 출품작 <슈미즈 차림의 마리 앙투아네트>다. 그림의 모델이 앙투아네트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면, 화제에 오를 법한 구석이 전혀 없다. 흰 모슬린 원피스를 입은, 패셔너블한 모자를 쓴 예쁘고 세련된 여성의 그림일 뿐이다. 미소를 살짝 머금은, 생기 있는 아가씨 모습이다. 하지만 그녀가 앙투아네트인 이상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시의 관람객들은 이 초상화가 ‘왕비답지 못하다’며 ‘부적절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악의를 가진 프랑스인들은 ‘오스트리아 여인’(앙투아네트)이 속옷만 입고 있다며 흉을 보았다.


<궁정예복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 271×195cm.

    ‘왕비’라는 겉모습, 즉 권력이란 프레임을 걷어내고, 앙투아네트 자신이 가진 여성적인 면과 인간적인 품성을 표현하려 했던 엘리자베스의 의도는 매몰차게 짓밟혔고, 그림은 금세 떼어내 치워졌다. 이 하얀 모슬린 드레스는 왕비가 평상복으로 종종 입던 옷인데,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체통을 잃은 것으로 간주됐던 모양이다.(왕비의 슈미즈로 당시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슈미즈가 유행했단다)

 <슈미즈 차림의 마리 앙투아네트>, 1783.

어찌되었든 엘리자베스는 일찌감치 성공가도를 달렸다. 결혼 전부터 그림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수입은 그녀의 호주머니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성들은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시대였으므로 딸이나 아내가 번 돈은 모두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였던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은 아마추어 화가이자 화상이었고, 그는 아내가 번 돈으로 컬렉션을 늘려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비록 재산을 소유하진 못했지만, 화상인 남편이 화가로서의 입지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 남성 중심 사회에 묻혔다 재발견된 선구적인 여성화가

엘리자베스는 프랑스대혁명의 소용돌이를 비껴갈 수 없었다.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 올려졌고, 따라서 공식화가였던 엘리자베스의 신변도 위험했다. 화상인 남편은 자신의 재력과 능력을 총동원해 엘리자베스를 유럽으로 피신시켰고, 불행한 망명자의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일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유럽 왕실과 귀족들은 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그림에 열광했다. 남편도 아버지도 없는 곳에서 자유롭고 맹렬하게 활동해나가 딸 줄리에게 최상의 교육을 얻을 만큼 충분한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 8년의 망명생활 후 돌아온 프랑스 혁명정부는 강제 이혼을 명령한 후였고, 이후 50대까지 작품활동을 해나간 엘리자베스는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600여개의 초상화와 200개의 풍경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작품은 현재 유명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마담 뷔제 르브룅과 그녀의 딸>,  130×94㎝ 

선구적인 여성화가,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삶에도 누구보다도 충실했다고. 딸을 품에 안은 그림 속 그녀의 미소는 유난히 잔잔한 평화를 자아낸다. 비제 르브룅은 남성 중심 사회에 묻혀 있다 최근에 와서 새롭게 발견된 화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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