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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May 31. 2016

모네, 찰나의 빛을 낚아채다

봄에 시작한 빛의 향연은 여름으로 옮겨가면서 한층 강렬해진다. 맑은 날 자연의 풍광 속에 있으면 수많은 초록들, 수많은 분홍들, 수많은 노랑들, 수많은 빨강들을 만나게 된다. 빛은 색을 변화시키고, 빛이 사라지면 색도 사라져버린다. 빛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변화를 낚아챈 모네의 아름다운 그림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초여름 들판은 평화롭다. 내리쬐는 햇살을 너른 품으로 다 받아낸다. 잡초들이 무성해지기 시작하지만 아직 여린 기운을 안고 있다. 연두에서 초록까지 그 다채로운 녹색의 기운 속에 눈부시게 하늘거리는 꽃잎이 눈에 든다. 다홍빛깔이다. 햇살이 관통한 빨강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꽃잎은 넓고 얇아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아무 데서나 보이는데 일렬종대, 횡대로 피지 않는다. 점점이 흩뿌려지듯 자연스럽게 분포돼 있다. 

아, 저 꽃 뭐지? …양귀비꽃란다. 아편의 재료여서 함부로 심지 못하는 꽃? 아니다. 우리가 보는 양귀비꽃은 관상용인 개양귀비꽃이다.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꽃>(1873)

그림 한 점이 눈에 든다. 어디서 어떤 경로로 발견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저장을 한 다음 오랫동안 컴퓨터 바탕 화면에 깔아두었다. 그림의 제목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그림을 그린 이도 찾아보지 않았다. 오늘에야 그 그림이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꽃>이란 걸 알았다. 더구나 1874년 4월,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 <해돋이 인상>과 함께 출품된 작품이란다. 


인상주의, 빛의 변화에 따른 형태 변화를 포착하다

하늘과 구름이 맑고, 들판에 개양귀비꽃이 가득 피었다. 멀리 보이는 농가와 키 작은 나무들. 꼭 프랑스가 아니어도 비숫한 풍광을 만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아이는 꽃을 들었고, 하늘빛을 닮은 푸른 드레스와 양산을 든 여인이 꽃밭 속에 있다. 뒤편의 모자(母子), 앞쪽의 모자는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인물보다는 풍경이 더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다. 세느강변이 있는 아르장퇴유는 모네가 친구들과 종종 찾던 곳이었고, 아내 까미유와 어렵게 결혼한 다음 일년 여 동안 근처에 집을 빌려 머물면서 주변의 풍광을 그렸다.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꽃>은 이 시기의 작품으로, 그림 속 모자는 아내 까미유와 아들 장이다. 

<양산을 든 여인>(1875)

이 시기의 작품 한 점을 더 보자. <양산을 든 여인>. 봄이거나 초여름의 어느 날이다. 여인이 양산을 펴고 산책을 나섰다. 어린 아들과의 동행. 여인의 실루엣을 담은 그림자가 햇볕이 제법 날카로웠음을 짐작하게 한다. 주위에 산산이 부서지는 빛의 알갱이들, 그 눈부신 햇살이 짐작된다. 바람 한 줄기가 아름다운 여인의 드레스 자락을 휘감는다. 잡풀더미도 살짝 바람에 기울어 있다. 그림 속 여인과 아이 역시 아내와 아들이다. 모네는 두 사람과 함께 소풍 나들이 가듯 산책을 나섰고, 이들을 모델로 주위의 풍광을 그렸다. 화목한 가족, 모네의 마음의 평화가 그림에 깃든 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까미유는 5년여의 인연을 끝으로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다.    

후대의 대중에게 가장 인기 높은 사조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출발한 인상주의다. 마네, 르느와르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 이전의 철저한 사실적 묘사나 재현에서 쉽게 얻을 수 없었던 감흥을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그림 속에 복잡한 의도나 심오한 사상 같은 것을 숨겨두지 않는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그릴 뿐이다. 모네를 위시한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형태와 색감에 집중했다. 특히 모네는 찰나의 빛을 담으려 내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해돋이 인상>

상식 하나 더. 인상주의라는 말은 인상주의의 첫 전시회에 걸린 모네의 <해돋이의 인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평가 루이 르로이가 인상주의를 비판하는 기사를 기고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아마도 아카데믹한 회화 관습으로 보았을 때 눈코입도 제대로 안 그린 모네의 그림은 습작처럼 보였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팔레트, 지베르니 정원

인상주의 첫 전시는 1874년, 마지막 전시는 1886년이었다. 인상주의가 과거의 사조가 되어가고, 신인상주의, 상징주의 등 새로운 사조가 막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던 때,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한다(1883년). 첫 아내 까미유 소생의 두 아이와 두 번째 아내가 데려온 여섯 아이와 함께. 

파리 근교에 있는 지베르니 정원은 관광객의 발걸음이 가장 빈번한 곳이다. 모네 자신이 직접 디자인 하고, 여섯 명의 정원사를 두고 가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네의 정원을 보기 위해서다. 일본풍의 작은 다리, 수련 연작으로 화폭에 옮긴 연못이 있는 ‘물의 정원’, 잘 가꾸어진 꽃과 벤치들.

“내 그림과 꽃 이외에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모네가 칠십이 넘은 나이에 지베르니 정원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정원에 대한 모네의 정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자신이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정원을 가꾸는데 들였다고 한다. 모네에게 지베르니 정원은 ‘세상에서 가장 큰 팔레트’였던 셈이다. 모네는 이 정원에 갖가지 화사한 꽃들과 일본의 창포와 붓꽃 등 진귀한 화초와 나무들을 키웠고, 500여 점의 화폭에 담아냈다. 지베르니 정원은 모네에겐 마르지 않은 샘이었던 것.  

<모네의 정원>(1895)

또 하나 이곳에 정착하면서 모네는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업적을 이뤄낸다. 모네는 1890년대부터 동일한 소재와 제재를 비슷한 구도와 분위기로 반복해서 그려내는 연작 시리즈에 몰두했다. 특히 1897년부터 1926년 눈을 감을 때까지 매달린 수련 연작은 그 정점에 있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은 모네의 아들이 사망한 후 관리가 되지 않다가 1980년에 들어와서 관리를 시작, 클로드모네 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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