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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Jul 13. 2016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에
가로막힌 비극적 사랑

 016_앙드레 지드, <좁은문>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했던가? 나는 무슨 짓을 했던가? 무슨 필요로 항상 그이 앞에서 나의 미덕을 과장하는 것인가? 나의 마음이 부인하는 이 덕은 과연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주님이 내 입술에 올려놓으신 말씀을 나는 몰래 배반하고 있었다…."  _알리사의 일기 중에서


책을 덮고 생각한다. 알리사의 사랑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고지순한 사랑, 속세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알리사의 사랑은 고결한 것이었고, 제롬의 사랑 역시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알리사는 자신의 사랑과 자신이 추구하는 덕의 부조화로 마른 꽃처럼 시들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알리사의 청교도적 절제에 숨이 막혔지만, 일기에 실린 알리사의 고뇌에 한없는 연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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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단편적으로 표현하는 게 걸리긴 하지만, 작가가 굳이 그 이야기를 작품 속에 담는 이유는, 그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자신의 의식 속에 깊게 고여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의식은 또 많은 부분 작가 개인의 강렬한 체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창작자의 욕구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독자가 어떤 작품에 유독 이끌리는 이유 역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자신의 고뇌가 그 이야기와 잇닿아 있을 때가 아닐까?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작가의 체험이 오롯이 담겨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나의 경건한 성품을 인도해 주고 있던 내 가정의(특히 엄격한 어머니의 청교도적) 기독교 교육과 내 신변의 모든 결연과 M(아내 마들렌드)이 없었던들 나는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도, <배덕자>도, <좁은 문>도, <전원교양곡>도 쓰지 않았을 것이며, 아마도 그 반발로  <교황청의 지하도>나 <사전꾼들>도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무엇을 썼을 것이냐 하는 건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1931년 일기 중에서)


소설 속 제롬은 부정한 어머니(제롬의 외숙모 뤼실 뷔콜랭)를 둔 사촌 알리사와 사랑에 빠진다. 지드의 아내였던 사촌누이 마들렌처럼. 그리고 지드 역시 열한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강요하는 어머니 밑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청교도적 교육과 종교의 구속, 작가 지드는 이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며 살아왔다. 여러 차례 퇴학을 당하며 불안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시절에 싹튼 외사촌 누이 마들렌과의 사랑과 결혼은 평생 그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91년 첫 작품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를 발표한 이래, 마들렌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가치와 기독교적 도덕 규범에 대한 순응과 반발이라는 지드의 내적 갈등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한편 작가가 그렇듯, 독자 역시 작품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정신적 배경이라는 게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녀 시절에 나는 헤세의 작품처럼, 지드의 작품들도 연이어 찾아 읽었다. <좁은 문>으로 시작해 <배덕자> <전원교양곡>을 연이어 읽었다. 내용도, 등장인물도 또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영혼의 완벽성을 추구하며 순수한 사랑을 했던 알리사의 고결함이 당시의 소녀(70년대 말 80년대 초반이었다)들에게 도드라지게 각인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역시 수십여 년 전의 일이니 지금의 아이들과는 거리가 꽤 멀다 싶다.       그때 읽었던 <좁은문>을 다시 읽으면서, 지금의 아이들에겐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답답한 소설이겠단 생각이 든다. 그러니 우선 독자들은, 청교도적 금욕주의에 꽁꽁 묶여 있던 지드 시대의 정신적 배경을 상상해내야 한다. 알리사나 제롬, 혹은 앙드레 지드의 온 영혼을 휘감았던 청교도적 금욕과 절제라는 올가미를 지금 우리의 사회 문화적 풍토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롬, 알리사, 줄리에트

<좁은 문>의 중심축은 외사촌 사이인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의 심리다. 그중에서도 특히 알리사의. 제롬은 “청교도적 규율과 결합되어” 자신의 영혼을 ‘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끌려고 하는 청년이다. 알리사 역시 숭고한 삶, 미덕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애쓰는 처녀다. 둘의 지극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이러한 두 사람의 위대하고 고상한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이다. 제롬과 알리사는 줄곧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좁은 문과 자신들의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며 방황한다. 한편 알리사와 대비되는 ‘밝은 아름다움을 지닌’ 줄리에트의 제롬에 대한 사랑은 극적 상황을 연출하는 변수로 작용한다. 

 열한 살 소년 제롬은 아버지를 잃은 해, 여름 휴가를 보내러 뷔콜랭 외삼촌댁에 왔을 때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알리사에게 마음이 끌린다. 알리사의 두 동생 줄리에트와 로베르가 함께 있었지만, 제롬은 알리사에게서 “우리는 서로가 더 이상 어린애들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두 해째 되던 어느 날, 외숙모 뤼실 뷔콜랭이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날 방 안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 알리사를 보고 제롬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알리사의 슬픔이 뭔지 모르지만, “그 슬픔이 팔딱거리는 이 작은 영혼과 오열로 온통 흔들리는 연약한 이 육신에게는 너무나 벅찬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롬은 “내 삶의 목적은 이제 다만 공포와 악과 삶으로부터 그녀(알리사)를 보호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몸을 바치기로 맹세한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은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둘은 약혼한 사이인 듯 행동한다. 제롬과 알리사, 둘은 너무도 사랑하는 사이다. 알리사에게 제롬은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다. 그 사랑의 깊이는 도저히 측량할 길조차 없지만, 알리사는 제롬과 현실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거리를 둔다. 

한편 제롬, 알리사, 줄리에트는 함께 성장하는데, 제롬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오히려 줄리에트였다. 제롬은 알리사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줄리에트에게 토로했고, 줄리에트는 그 과정에서 제롬에 대한 사랑을 남몰래 키워 왔던 것이다. 점점 더 다가서려는 제롬과 그와의 사랑에 거리를 두려던 알리사, 그 와중에 동생 줄리에트가 사랑하는 남자가 제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알리사는 제롬에게서 멀어질 결심을 한다.    

줄리에트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해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알리사는 제롬이 군대 생활을 마칠 때까지 편지만 주고받는다. 제롬을 통해서가 아니면 세상 만물을 볼 수 없는 알리사였지만, 좁은 문에 이르기 위해서 알리사는 제롬에 대한 사랑을 단념하기로 한 것이다. 제대 후 알리사를 만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불안하게 이어질 뿐이다. 어색한 만남 후 곧 알라사는 제롬에게 이별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3년이나 지난 뒤에야 제롬은 알리사를 만나게 되는데, 알리사는 이미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알리사는 제롬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물건을 없애버리는 등, 제롬을 잊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 혹독한 금욕과 자기 절제의 싸움은 마침내 알리사를 병들게 하여 알리사는 요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제롬에게 보낸 무수한 편지에 다 싣지 못한 알리사의 내면적 고뇌는 소설 말미에 나와 있는 일기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녀는 숨을 거두며 이렇게 회의한다. “나의 마음이 부인하는 이 덕(德)은 과연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라고. 


알리사, ‘미덕’이라는 올가미에 걸리다

알리사의 일기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고뇌의 깊이를 우리는 제대로 알기 어렵다. 너무나 사랑하는 제롬과의 재회를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녀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숭고한 미덕(美德), 고결한 영혼의 길,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그 길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단념한 알리사. 왜 그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한 것일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알리사에게 인간의 삶이란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에 들어서는 것이다. 알리사는 그 중 좁은 문, 즉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택한다. 그녀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어머니 뤼실 뷔콜랭이었다.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뤼실 뷔콜랭은 식민지 출신으로 태생부터가 분명치 않은, 행실이 좋지 못한 여인이다. 

모호하고 알길 없는 거짓 발작, 낯선 장교와의 부적절한 행위들, 그러다 마침내 가출하고 마는 어머니. 어머니의 이러한 부도덕한 행실은 알리사에게 너무나 크나큰 고통이었다. 알리사는 그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서 감당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행실은 알리사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알리사에게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다름 아닌 어머니 뤼실 뷔콜랭이 선택한 문이었다! 어머니의 일을 겪으며 알리사는 어머니와는 정반대되는 삶, 철저한 금욕과 자기 절제를 통해 성스러움을 추구,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에 들어설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알리사였으니 순결해 보이는 종교적 삶의 태도를 지닌 제롬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알리사에게 그녀 자신이 추구하려던 겸허한 종교적 삶이란 사실 조금은 막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롬이 그녀에게 바치려 했던 삶의 태도, “공부, 노력, 경건한 행동” 등을 보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깨닫게 된다. 이제 알리사의 삶은 온통 제롬을 모방하거나, 혹은 제롬과 함께 할 때만 유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알리사는 제롬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커다란 절망에 도달한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 좁은 문을 제롬과 둘이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완덕(完德)이 오로지 그를 위해서였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없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롬을 만나면서 자신의 삶의 목표가 흔들리게 되자 알리사는 결연히 제롬을 단념하려 한다. 제롬을 멀리하고 오로지 서신만 왕래하다가 그마저도 중단해버린다. 

알리사의 외향의 변화가 그 내면의 황폐함을 드러내 보여준다. 


“…납작하게 바짝 졸라맨 머리 모양이 표정마저 아주 달라보일 정도로 얼굴의 생김새를 딱딱하게 했다는 것쯤이야 무슨 상관이 있었으랴? 꺼칠꺼칠하고 보기 흉한 천으로 지은, 음침한 빛깔의 어울리지 않는 윗옷이 우아한 몸매의 곡선을 손상시키고 있다는 것쯤이야 뭐 그리 중대한 일이랴?”


가슴 깊이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성의 힘으로 밀어내는 것. 이 지난한 싸움 끝에 알리사는 병을 얻고 만다. 알리사는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의 신념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나  회의한다.     


“덕과 사랑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영혼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나는 때때로 사랑한다는 것, 할 수 있는 한 사랑을 한다는 것, 끊임없이 더욱 사랑한다는 것 말고 또 다른 덕이 있을까 의심해본다.”


알리사의 사랑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결한 한 송이 꽃이 시들고 메말라 땅에 떨어졌다. 꽃을 피우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과 햇살 한줌’. 알리사에게 그것은 제롬의 사랑이었으리라. 하지만 알리사는 더 영원한 삶, 더 고귀한 영혼, 더 그리스도적 삶을 위해 제롬의 사랑을 멀리하다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른다. 

 알리사, 우리는 그녀의 사랑을, 그녀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좁은 문>은 작품이 발표된 1910년부터 오늘날까지 가장 모순된 해석이 팽팽히 맞서는 작품이다. 한편에서는 이 작품이 주인공 알리사의 숭고한 희생과 기독교적 신앙에 대한 절대적 추구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즉, 자기 희생과 철저한 절제와 금욕주의적 이상을 품고 실천하려 했던 알리사는 고귀한 기독교적 인물로, 신과 합일을 이루는 신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를 부정하는 또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알리사는 명석한 비판 정신이 결여된,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스스로의 삶을 파멸로 이끈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비판이다. 미덕에 대한 그릇된 인식, 과도한 종교적 추구로 고독과 절망 속에 죽어간 알리사는 천상의 행복을 위해 단순하고 소박한 지상의 행복을 저버린 광신자라는 지적이다. 

작품 비평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 비평가의 판단과 별개로, 독자인 우리들 역시 알리사의 삶의 태도와 사랑의 방식에 대해 엇갈린 평가가 많다. 비록 현실에서 열매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대에 대한 지순한 사랑은 여전히 감동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랑의 열망을 절제의 칼로 도려낸 알리사의 사랑의 방식이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만든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드는 <좁은 문>을 도덕적인 작품으로 평가하는 일군의 비평가들에게 이 작품은 앞서 나온 <배덕자>와 마찬가지로 청교도적 엄숙주의에 대한 경고임을 분명히 하였다. 즉 배덕자가 도덕과 종교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과도한 개인주의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라면, 이와 반대로 <좁은 문>은 과도한 자기 희생을 통해 성스러운 지복을 추구하는, 오만이 깃든 기독교 신비주의의 한 행태를 고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드가 그려낸 알리사는 오만한 기독교의 신비주의 행태를 고발하기 위한 인물로는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작가가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알리사라는 인물을 창조해냈는지 작품 속에서 드러난다. 무엇으로도 알리사가 보여준 도덕적 위대함을 폄훼하기 어렵다. 이미 <좁은 문>의 알리사는 문학적 생명력을 얻은 인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리사의 삶과 사랑과 종교에 대한 태도와 방식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는 이분법적 논의는 참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알리사가 왜 청교도적 금욕주의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 짐작하고 있을 뿐이며, 자신의 선택에 그녀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알고 있으며, 그녀의 내면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책을 덮고 나면, 청교도적 금욕주의와 자기 절제에 희생된 알리사가 너무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왜 알리사는 행복할 수 없었을까? 그녀 자신의 회한대로 “사랑한다는 것, 할 수 있는 한 사랑을 한다는 것, 끊임없이 더욱 사랑한다는 것 말고 또 다른 덕이 있을까?”


몇 가지 남은 생각들

고결한 청년 제롬과 처녀 알리사의 사랑에 알리사의 아버지는 자꾸 되묻는다. 

알리사가 아버지에게 제롬이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얘야, 우선 알고 싶은데, 넌 어떤 뜻으로 ‘훌륭한’이란 말을 쓰고 있지? 보기엔 그렇지 않고, 적어도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사실은 아주 훌륭한 사람도 있는 법이야……. 하나님 눈으로 보면.”


그리고 제롬과 알리사가 괴테의 말을 떠올리며, 명상의 능력을 최고위에 놓자 잠자코 있던 알리사의 아버지가 쓸쓸히 미소지으며 말한다.


“얘들아, 비록 부서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서 당신의 모습을 알아보실 게다. 생애의 한 순간만을 언뜻 보고서 그 인간을 간단히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젊은 청년들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의 도그마를 삶의 연륜을 지닌 알리사의 아버지는 염려했던 것 같다. 

지금 이 소설을 읽고 이런 저런 생각을 기울이다 보니, 어설픈 미소가 지어진다. 

지드의 마음은 어찌 보면 알리사 아버지의 마음과 같았으리라. 너무나 사랑하는 딸 알리사의 그 생각을 귀하게 존중해주면서도 그 틀을 벗어나 조금 더 유연하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랐겠지.

알리사의 아버지가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을까?

오히려 강고한 현실의 논리라는 올가미가 걸려 너무 쉽게 이상(理想)을 몽상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 우리들에게 반대로 알리사의 태도를, 제롬의 태도를 배우라 하지 않을까?




>> 앙드레 지드(1869~1951)

파리 출생.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강요하는 어머니 밑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10대 후반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 시작해, 사촌누이에 대한 사랑과 청소년기의 불안에 관한 자전적 작품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로 등단했다. 초기부터 그는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사랑의 갈등, 자아에 대한 심리 분석 같은 테마를 다루었다. 1893년 지드는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계, 새로운 도덕 기준을 접함으로써 엄격한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벗어나 강렬한 생명력을 향유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작품으로는 <좁은 문> <전원교양곡> <교황청의 지하실> <사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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