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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세대 차에 생태계 차까지,
자녀와 불통은 당연

공부하는 학부모_텍스트, 콘셉, 콘셉트

by 김지나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는 부모 세대의 그것과 완벽히 다르다. 더구나 세상이 광속으로 변화해 뒤쫓아가기도 버겁다. 생존을 위해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핵심역량이 무엇인지 텍스트, 콘셉, 콘셉트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고민해보는 시간이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

얄궂게도 오늘이 2017 수능날이다. 둘째 아이가 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고3이라고 해도 언제 몇 시에 무슨 학원을 가는지도 잘 모를 만큼 아이의 학습에는 무심하다 싶은 엄마였지만, 그래도 며칠 전 학력고사 치르는 꿈을 다 꾸었다. 이 꿈의 테마는 늘 비슷하다. 시험을 코앞에 둔 고3이거나 시험장에 들어가 시험을 치르는데 너무 빤한 수학 공식조차 하나도 안 떠올라 당혹해한다는 내용이다. 며칠 전에도 비슷했다. 고3 수험생인데 고교에 오면서 수학 문제집 하나 풀지 않은 백지 상태라 후회막급인 상황. 거의 서른 무렵까지도 종종 이런 꿈을 꾸었다. 꿈을 꾸면서 중간중간 ‘이건 꿈이야, 넌 대학도 다 졸업했어.’라고 혼잣말을 하기까지 했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제대한 지 한참 된 남자들이 다시 군대에 소집되는 꿈과 비슷한. 수능이란 아이들에게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처음 맞는 어려운 도전이다.

이 날을 위해 아이들은 수많은 고비를 넘어왔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아이들이 겪었을 부담은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성적 여부보다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이 부담에 더 결정적이란 생각이다. 성적이 좋은 경우에 이 갈등이 더한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다. 수능이 끝나면 아주 홀가분할 것 같은 기분이다. 아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다. 밀도 높은, 강력한 스트레스가 집안 공기를 무겁게 할 공산이 크다. 많은 수험생들이 가채점 결과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심각한 스트레스에 대한 대응이 아이들과 어른이 너무 달라 집안에서 한바탕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말을 하거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 상황을 피하려는 경향이 크다. 잠만 자거나 말없이 게임에만 몰두하는 식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속 모르는 어른이 한 마디 언짢은 잔소리를 하거나 비난을 할 경우 갈등이 순식간에 증폭돼 실제로 극단적인 선택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아이들은 어른인 적이 없고, 어른인 부모들은 아이일 적을 잊었으니 그 어마어마한 간극을 어찌 이해하랴. 《어린왕자》에 나오는 말처럼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을 주구장창 듣고 살다가, 결국 그 말을 하게 되는 게 인생이려나.

“어디에 갔다 왔느냐?”

“아무 데도 안 갔습니다.”

“도대체 왜 학교를 안 가고 빈둥거리고 있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느냐? 너의 선생님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항상 인사를 드려라. 왜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지 않고 밖을 배회하느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거라.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땔감을 잘라오게 하였느냐?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쟁기질을 하게 하고 나를 부양하라고 하였느냐? 도대체 왜 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버전이 다르지만 아주 낯익은 이 글은 기원전 1700년경의 수메르 점토판에 새겨져 있는 내용이다. 세대 차이란 그야말로 인류가 사회를 이룬 초기 역사부터 있어온 셈이다.



고양이 백 마리쯤 들여놓아줄걸, 하는 후회

세대 차라는 게 이렇다보니 부모와 자녀의 갈등은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좀 억울한 게 있다. 분명 우리가 청소년 시절에는 부모에게 야단은 들었지만 대놓고 대거리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가 돼서 보니 아이들과 부딪칠 때마다 아이들이 ‘갑’이고 내가 ‘을’인 기분이 든다. 내 돈 들여 먹이고 입히는데 아이들의 천연덕스러운 대응에 종종 작고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이 억울함과 답답함이 쌓이다가 날 잡은 듯 목소리를 높여보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목소리를 높여도, 목소리를 낮춰도 완패 당하는 기분이다. 더구나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들어서면 그 기세를 감당하는 게 버겁다. 가출할 만큼 극심하지는 않지만 부모와 자녀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집집마다 벌어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주위에 고등학생 아들과 싸우다 차 몰고 나가서 한적한 곳에 주차해놓고 차 안에서 밤을 새고 새벽에 집에 돌아왔다는 친구도 있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길 방법은 없을까?

세상의 방법이란 게 늘 거기서 거기고, 방법을 몰라서 해결을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객관적 사실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해결의 첫걸음인 것을 어쩌랴.

내 아이들이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둘째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였다. 아이를 낳고 기른 지 15년은 훌쩍 흐른 셈인데 지금 생각하니 한심하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니 당연하기도 하다. 어떤 일이든 십여년쯤 지나야 감이 오는 법이지 않던가.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했지만 쉽지는 않았고, 둘째가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에는 큰 애도 있고 하니 믿거라 하며 바쁘게 살았다. 아이가 늘 무섭다는 얘기를 했지만 건성으로 들었다. 겁이 좀 많은 아이들이기도 하고 해결방법도 뾰족한 게 없는 탓이다. 세월이 흘렀고 둘째가 초등 고학년 무렵 우연히 고양이 한 마리를 집에 들이게 되었다. 반려견이나 반려묘에 대해 마뜩치 않았지만 인연이 있었는지 그렇게 되었다. 지금은 고양이가 두 마리로 늘었고, 냥이들은 늘 둘째의 꽁무니를 쫓아 다닌다.

둘째가 중학생일 적에 수다를 떨다 이런 얘기를 했다.

“엄마, 나 초딩 때 학교 갔다 오면 너무너무 무서워서 방마다 불을 다 켜고 텔레비전을 틀고 있었어. 진짜 너무너무 무서웠어.”

그날 불현듯 갓 입학한 여덟 살 여자 아이가 빈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4남매의 막내에 집에 늘 엄마랑 할머니까지 계시던 환경에서 자란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환경이었다. 그 두려움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마음이 조금 아팠고, 조금 후회되었다. 젊은 엄마였고, 내 짐이 무거웠고, 그래서 아이가 무섭다고 하던 말을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고양이를 한 백 마리쯤 들여놓아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들과의 전선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나도 입시를 치렀지만 내 경험이 아이들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과외 금지 시대라 학원 한번 과외 한번 안 해본 내가 지금 아이들의 그 빡빡한 일정이 주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서울 서초구에 소재한 A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인 이가연(가명·17)양의 하루는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매일 정규수업에 보충수업까지 마치고 하교하는 시간은 오후 6시 30분. 하루 종일 이어진 수업에 허기가 지고 진이 빠지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다. 강남구 소재 학원에서 8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을 듣기 위해 서둘러 이동한다. 김 양은 오늘도 학원 앞 편의점에서 혼자 라면과 김밥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_<이데일리>(2016. 11. 15)


집에 가면 늘 따뜻한 저녁 밥상을 받았던 우리가 이렇게 ‘혼밥’을 먹는 이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

결국 세대 차라는 것은 이렇게 아이와 내가 자란 환경이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누가 물을 발견했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그는 물고기는 아니었을 것이다”_맥루한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와 자녀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은 ‘원플러스 원’이다. ‘넘사벽’ 세대 차에 더 강력한 장벽이 더해졌으니 바로 생태계 차이다. 생태계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과 자연이 함께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세계이다. 디지털 생태계는 공존과 지속가능성이라는 의미를 만들어낸 생태계라는 개념에서 파생한 것으로, 디지털 기술에 의해 상호적인 진화가 일어나는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즉,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또 다른 환경으로 수많은 아날로그 정보들이 디지털로 변화되면서 디지털이 인간의 삶 전반을 뒤흔드는 세상이 도래했다는 뜻이다.

2000년대 이후 태어난 우리 아이들은 이미 주변의 기술을 물이나 공기처럼 원래 있었던 것으로 받아들이는 디지털 생태계의 원주민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디지털 생태계에 겨우 이주해온 이주민이거나 유목민일 뿐이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본 광경을 잠시 ‘몰카’로 찍은 사진이다. 아이의 아빠는 옆에서 졸고 있었고 아이는 스마트폰에 빠져 있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의 지하철의 풍경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이 아이는 여전히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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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이론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마샬 맥루한의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누가 물을 발견했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그는 물고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와 자녀들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밥을 먹고 살아가지만 결코 ‘같은’ 삶이 아니다. 아이들의 미래가 아닌, 현재가 이미 우리와 달라 있다. 이 다름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에서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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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셜 맥루언과 《미디어의 이해》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마셜 맥루언은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가장 논쟁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대중문화이론과 커뮤니케이션 이론, 미디어 이론의 독보적인 개척자로 ‘월드 와이드 웹(www)’이 등장하기 30년 전에 이미 이를 예견한 인물로 논쟁의 중심에 있다.

그의 대표작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에서 그는 부제에 밝혔듯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파악하고,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단언한다. 일반적으로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미디어라고 부른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이 만든 모든 인공물, 예를 들면 바퀴, 옷, 주택, 무기 등을 미디어라고 불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그의 독창적인 이론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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