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마르 시난의 건축 예술이 숨쉬는
에스키 자미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공간이 주는 얘기에 빠져버렸다.
결코 화려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은 소박하고 작은 사원 안으로는
미마르 시난이 낸 창을 통해 햇살이 비껴들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나는 일행과 떨어져 그들 속에 섞여
묵은 내 짐을 풀어두고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에디르네에서 얻은 가장 귀한 것은, 여행은 결코 현지의 무엇인가를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이스탄불 공항을 빠져나온 것은 새벽 어스름이었다. 고요함 속의 재바른 움직임은 여느 도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일행을 태운 차가 고속도로를 달린다. 에디르네까지는 두 시간 정도 가야 한단다. 에디르네(Edirne)라? 귀에 익지 않은 지명이다.
시내를 빠져나가자 낮은 평야가 계속 된다. 늦여름이면 그 평야 가득 해바라기가 핀다고 했다. 얼마나 장관일까. 그날엔 안개가, 끝없이 너른 평야와 낮은 하늘과 서늘한 새벽 공기를 감쌌다. 묵묵히 안개의 바다 속을 달리며 해돋이를 보았다. 그 장관을 찍으려 잠시 차가 멈추고, 사진기자들이 언덕으로 몰려가 눈으로 본 풍경을 가슴에 각인하고자 했다. 평온한 고요가 여행의 피로를 위무한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불 함락의 결전을 다짐했던,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
드디어 에디르네에 접어들었다.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이곳이,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소박하고 평온한 공기가 온몸에 내려앉았다. 에디르네는 이곳에 닿기 전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지명이다. 그러나 와서 보니, 에디르네의 위엄과 위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시아의 역사에서 터키의 역사가 없었다면 자존심이 좀 상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터키 아나톨리아 영토는 광대하다. 몽골 초원을 달리던 투르크족(우리에겐 돌궐족으로 불리던)은, 13세기 말 경 오스만 제국을 세운다. 투르크족의 부족장이었던 오스만 1세는 세를 확장하여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군을 거듭해 마침내 유럽의 동쪽 길목에까지 닿았고, 이곳 에디르네를 수도로 정하고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이곳을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했지만 십자군의 등장으로 좌절된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후 최전성기를 달렸고, 마침내 비잔티움 제국을 장악한다. 그들은 마르마라 해에서 골드혼에 이르는 수십 킬로의 산길에 통나무를 깔아 전함을 옮겼고 이 전함들은 산을 넘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1453년, 마침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동양의 오스만 제국에게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다. 오스만 제국의 위용이 얼마나 높았냐면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일부, 서아시아를 거느린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에디르네는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기 이전의 오스만 제국의 명실상부한 수도였다. 콘스탄티노풀 함락을 위한 최후의 결전을 다짐한 곳도 다름 아닌 에디르네에 있는 에스키 자미였다.
나는 숙소에 짐을 풀고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호젓한 산책길에 나섰다. 숙소는 셀리미예 사원 부근이었고, 바로 옆에는 오스만 제국의 용사들, 혹은 사람들이 잠든 아담한 묘지 공원이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와 몇 명의 행인들이 그곳을 지나고 있었고, 저기 멀리서 환하게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여행객들은 보이지 않았고, 소박한 일상을 일구는 주민들만 보였다. 히잡을 쓴 늙은 아주머니들이 버스를 기다렸고, 상인의 짐수레에는 싱싱한 야채가 차지하고 있었고, 가게 앞에는 벌써부터 나이 든 남자들이 모여 차를 나눴고,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가 길을 지났다.
아직 산재한 모스크와 유서 깊은 시장과 목욕탕(소쿨루 하맘. 1569년 미마르 시난이 지은 것으로 지금까지도 이용되고 있는 공중목욕탕)과 지금은 건강박물관으로 통칭되는, 대학 겸 병원 겸 모스크를 갖춘 유적들을 두루 살피기 전이었지만, 이미 에디르네는 내게 충분했다.
에스키 자미, 여행은 현지의 무엇을 대상화해서는 안 돼
오후 일정이 시작됐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오스만의 미켈란젤로, 혹은 이슬람의 다빈치로 불리는 미마르 시난의 건축예술 탐방이었다. 본격 취재에 나섰다. 코앞의 셀리미예를 두고 먼저 에스키 자미Eski Cami 로 향했다. 내 발걸음에는 별다른 기대가 실려 있지 않다. 둥근 지붕의 모스크라는 게 생소하지만 이미 터키의 상징이요 관광자원으로 얼마나 소비되었던가.
에스키는 올드old 라는 뜻이니 에스키 자미는 말 그대로 ‘오래된 사원’이라는 뜻이다.(1403~1414년 완공. 건축가 하즈 알라딘이 디자인하고 외메르 이브라힘이 건축한 이슬람 사원으로 에디르네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올드 사미로도 불리는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캘리그래피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출입문 좌우로 이슬람 문자가 하나씩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오스만 건축 양식을 확립한 미마르 시난(1489)은, 셀리미예를 짓는 6년여 동안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내부가 너무 어두워 여러 개의 창을 새로 만드는 보수 공사를 했다는 설명도 덧붙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공간이 내게 들려주는 얘기에 빠져버렸다. 결코 화려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은 소박하고 작은 사원 안으로는 미마르 시난이 낸 창을 통해 햇살이 비껴들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관광 상품으로 소비되는 모스크가 이들에겐 일상의 공간이며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들은 이곳에서 마음을 닦고 있었다. 모스크가 신성한 기도의 장소라는 뻔하고 단순한 사실을 비로소 느끼다니. 나는 그 순간만큼은 여행객이거나 이방인이고 싶지 않았다. 일행과 떨어져 그들 속에 섞여 묵은 내 마음의 짐을 풀어두고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에디르네에서 얻은 가장 귀한 것은, 여행은 결코 현지의 무엇인가를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셀리미예 모스크, 미마르 시난의 걸작
에스키 자미에 가던 날 아침, 나는 셀리미예 모스크 정원을 산책했다. 두 명의 사내가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고, 장미처럼 생긴 빨간 꽃이 초록의 정원에서 아침 볕을 받아 또렷하게 빛났다. 정원은 물론이요, 담장 너머의 집들도 모두 담백한 아름다움을 발했다.
너무 맛있어서 아껴둔 음식처럼, 우리 일행은 다음날에야 셀리미예 모스크를 찾았다. 터키의 자랑, 미마르 시난(1489~1588)은 둥근 돔과 첨탑이라는 오스만 건축 양식을 확립했는데, 살아 생전 모두 477개의 건축물을 지었다니 과연 이슬람의 다빈치라 불릴 만하다. 셀리미예 사원은 그의 나이 여든을 넘어서 완성을 보았다니, 노련한 기술력이 빚은 역작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에 보았던 정원을 지나 문을 열고 사원 안으로 들어서니 과연 어제의 에스키 자미와는 차원이 달랐다. 여덟 개의 우람한 다리가 중앙의 거대한 돔을 떠받들고 있었다. 그 둥근 원형을 장식한 특유의 터키 문양이 얼마나 단아하면서 화려한지 스마트폰을 들고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면서 영상에 담아 보았다. 시난이 지은 이 사원은 어제의 올드 모스크와 견주면 확실히 밝았다. 사방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키프대학의 수피 사치 건축학과 교수가 취재진을 위해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는데, 딱 하나, 이런 요지만 귀에 담았다. 건축의 독창성, 완벽성, 뛰어남을 기술로 설명하지 않겠다면서 (그건 사실 전문가의 영역이기도 하고) 미마르 시난은 이 모스크를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숨 쉬고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돔의 원대함, 빛을 유입하는 창문의 섬세함, 외부를 향해 있는 첨탑의 위용 같은 건축적 기술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닿는 지점은 이처럼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셀리미예 모스크는 거대하고 화려한데도 불구하고 요란스럽지 않고 단아해서 더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틀 동안 에디르네를 누볐다. 이곳에 다 옮길 수 없을 만큼, 볼 것, 갈 곳이 차고 넘쳤다. 취재진을 만난 에디르네 주 지사가 이곳은 1미터마다 유적이 나온다고 자랑했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에디르네에 반했으니까.
에디르네의 마지막 밤에, 홀로 숙소를 나와 점방에서 터키 빵과 에페스 맥주 두 병과 누른 팝콘처럼 생긴 과자를 사서 비늘 봉지에 넣고 어슬렁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만큼은 지나는 길손이 아니라 현지인의 기분이 났다. 몇 해 전 터키에 왔을 때, 그 빵을 꼭 상점에서 사서 덜렁거리며 들고 오는 걸 해보고 싶었는데, 바람이 이뤄졌다. 저녁 대신 빵과 맥주를 마시며 옛 자취와 현재의 소박한 삶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어우러진 에디르네를 다시 오마고 다짐했다.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버스로 10분이면 닿는다니, 다음엔 유럽으로 건너가 봐야지, 하면서. 불가리아에서부터 흐른다는 미라차 강과 툰자 강이 흐르는, 고즈넉한 풍광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시간은, 기억에 그리움을 곁들여 아련한 추억으로 바꿔버리는 마술을 부린다.
>> 박스
건강박물관
에디르네 시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툰자 강가에 있다. 이 건물은 미마르 하이레틴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크게 병원과 의과대학, 모스크로 구분된다. 오스만 시대에 행해졌던 여러 가지 치료법이 재미있는 조각과 함께 잘 설명되어 있다. 1916년경에도 병원으로 이용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후 방치돼 있었고, 1984년부터 대대적인 발굵과 연구, 수리 및 복원을 거쳐 2008년 4월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건강박물관으로 향하던 길에 만난 툰자 강변의 정취도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