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랜Jina Oct 20. 2019

나다운 휴식은 뭘까?

#43ㅣ미국에서 느끼는 휴식의 의미..

휴식이라 하면 열심히 일한 뒤의 달콤한 나만의 느긋한 말랑말랑한 놀이? 그런 느긋한 그림 같은 쉼이 휴식이라면 나에게 휴식의 시간은 없다. 하루 10시간 이상 중노동과 가사와 병행해야 하는 그런 힘듦이 있어서 휴식시간이 없다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한국에서의 지친 일상으로 딱 3년간의 휴식시간을 가져보고자 미국이란 곳에 왔다. 3년이 13년을 넘어 더하기 3을 해야 하는 숫자만큼 살고 있지만, 휴식이라는 뜻을 휴가쯤으로 여기고 한여름에 바캉스를 떠나는 듯 집 정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냥 간단한 여행 도구만을 챙겨 와 예쁜 그림 같은 집에서 며칠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집에 가려는 그림을 그렸나 보다. 휴식이라는 그럴듯한 여유로운 말들로 포장해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여유만만하게 출발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나와 비슷한 휴식을 취하러 온 동련 배가 있었다. 우리 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존 홉킨스 대학과 메릴랜드 대학교가 있어서 내가 사는 아파트에 한국에서 안식년이라 해서 짧게는 1-2년, 길게는 2-3년 가족을 동반해오는 부부들이 많았다. 그녀의 가족도 연수를 목적으로 남편은 안과의사로 존 홉킨스 연구실에서 일을 하기 위해 왔고 그녀는 강남 유명한 피부과 의사라고 했다. 그 옆집으로 이사 온 남편이 의사인 부부도 비슷한 상황으로 왔다고 했다. 안식년은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허락하에 쉴 자격을 주는 기간이니 그냥 쉬면 된다. 아마 생활비 정도는 소속된 곳에서 지불하는 듯하다.

  

 세 여자는 비슷한 나이이기도 하고 온 시기가 거의 같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커피 타임도 갖고 한 대의 차로 쇼핑도 다니며 한껏 휴가를 즐겼다. 여자들이 친해지니 남편들도 같이 모여 술자리도 하고, 일하는 기계처럼 돌다가 먼 타향에서의 여유로운 시간 들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1년의 짧은 안식년을 허락받았기에 짧고 굵게 산다는 목적이 있어 느긋한 하루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상황이 달랐다. 바캉스 도구만 달랑 챙겨 와 즐기다 다시 돌아가는 휴가가 아니라는 걸 그들을 통해 조금씩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3년의 생활을 하려면 영어는 마스터해야 한다 생각했고, 남편의 직장도 어떻게 전개될지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들과의 만남도 관계 유지하면서 학교도 다녀야 하고 돈도 절약해야 하고 틈나는 대로 책도 봐야 하고... 어느 날 피부과 여의사가 말했다.


“좀 쉬어요. 지나씨 보면 하루가 정말 빨리 가는 거 같아요. 천천히 해도 될 거 같은데..”
“어떻게 쉬어요?”
“전 늦게 일어나서 늦게 밥 먹고 느리게 하루를 살아요.”


내가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모양이었구나. 그때 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아팠다. 난 휴식을 하러 왔다고 하면서 목표를 세우고 휴식은커녕 또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달리기를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적어도 하루는 나를 위해 커피를 마시며 창밖 하늘을 본다고 본 거 같다. 곧바로 난 한숨이 나왔다. 하늘을 보면 뭐가 있나? 커피를 마시며 영어공부라도 한자 해야지 아니면 뉴스라도 보던가, 그것도 아니면... 이건 휴식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고기 맛을 안다고 나에겐 잠시의 휴식도 줄 수 없음이 그저 내 몸에 맞지 않은 무거운 갑옷 같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 몇 해 뒤에 진짜 바캉스를 갔다. ‘캔쿤’이라는 멕시코 근처 환상의 바다로... 호텔 하나만 예약하면 모든 게 패키지로 묶여서 비행기 티켓에서부터 5성급 호텔 안에서 먹고 자고 노는 게 포함되어 천국에서의 놀이처럼 그 푸른 바닷가에서 비치 의자에 누워만 있어도 되는 꿈같은 여행이었다. 셋째 아이가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고 살짝 시간적, 정신적 여유로움이 생기니 마음이 동 했나 보다. 첫날은 좋았다. 일단 내 손으로 밥을 하지 않아도 멋진 레스토랑에서 무한정으로 어디서나, 무엇이나 먹을 수 있고 아이들이 그저 뛰어노는 것만 보면 되는 일이니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쉽고 이것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다음날부터 나의 휴식에 대한 둔탁함에 또 나답지 않은 휴식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막막했다.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그래, 와인도 한잔 폼 나게 마셨다. 휴식이 또 고역으로 느껴져 미칠 노릇이었다. 난 휴식을 갖지 못하는 병에 걸렸나 보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 내가 좋아하는 미국 시스템이 딱 하나 있다. 아이들 학교에 쉬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학교는 50분 수업하고 10분 쉬고, 또 50분 수업하고 10분 쉬는 건데 여기 초등학교는 한 과목의 수업이 끝나면 쉬는 시간 없이 곧바로 다른 과목 선생님이 들어오고 수업이 끝나면 또 다른 과목이 시작된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아이들은 수업 중 아무 때나 손을 들고 선생님이 허락하면 화장실에 갈 수 있다. 그래서 전교생이 똑같은 쉬는 시간이 아니니 화장실이 붐비는 일 따위는 없다. 중학교부터는 쉬는 시간이 있다. 단 3분... 거짓말 같지만 대학생들처럼 자기의 수업 스케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교실을 옮겨가며 수업을 한다. 그런데 딱 3분의 시간만을 주므로 딴 데 정신을 팔 수가 없다. 가방을 메고 그대로 다른 교실로 이동하는데 화장실도 못 가고 친구들을 복도에서 만나도 ‘Hi’ 눈인사만 해야 한다.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음으로 딴 곳으로 셀 수 있는 이유를 만들지 않겠다는 조치인 셈이다. 좋은 정책이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 6일 동안 일을 하시고 7일째 날에 쉬시면서 안식일이라는 일요일을 선사하셨고 부처님은 보리수나무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요즘엔 일요일뿐만 아니라 토요일도 휴일로 쳐서 학교는 물론 공공기관도 문을 열지 않으니 안식일이 이틀이 되어버렸다. 한국도 ‘놀토’라고 해서 한 주 건너 한 번씩 토요일이 휴일이 되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지금은 토요일이 아예 휴일이 되어 ‘불금’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전엔 일요일이 휴일이니 모든 약속이 토요일 저녁에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불타는 금요일이라 해서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금요일 저녁부터 휴일로 생각되어 들뜬 마음을 표현하는 정당화된 단어가 되어버렸다. 현대인의 휴식시간이 길어진 셈이다.

   


여기 서의 휴일은 참으로 조용하다. 휴일의 시간이 필요 없을 거 같은 느린 호흡과 느린 걸음으로 일을 하지만 이들 나름의 느린 철학으로 느리게 휴식을 취하는 듯하다. 우리 옆집의 하얀 단발머리 여자는 이제 할머니가 되어서도 잔디 깎는 차에 올라 타 바삭바삭 잔디를 깎고, 앞집에 살았던 아들은 머리가 희끗해져 돌아와 캥거루가 되어 엄마 집에 들어와 집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고에서 생활하는데 오늘도 열심히 엄마 공양을 하는지 차고 앞을 치우고, 뒷집에서 키우는 돼지는 큰소리 내며 긴 막대기를 든 주인을 따돌리려 도망 다니고 있다. 바로 앞길로는 엄마와 아들이 집게와 비닐을 들고 길가 옆 숲 속의 쓰레기를 열심히 수거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보인다. 참으로 넉넉하고 느긋한 휴일 풍경이다.

  

돼지 한마리를 위해 만들어진 튼튼한 담장을 친 뒷집/고즈넉한 뒷마당을 가진 하얀 단발머리 여자의 앞집

나는 휴식이 뭔지 모른다. 어렸을 때는 꿈과 희망으로 가슴만 벅찼고, 젊었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의 스케줄이 빡빡했고, 나이가 들면서는 나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무언가를 찾아 팔랑대며 집중해야 했기에 내 몸의 온 에너지를 쏟아내야 했고, 지금은 글 쓰는 일에 매달려 도대체 텅 빈 머리로 하늘 한 번, 나무 한번 쳐다볼 수 없으니 아니, 쳐다본들 머릿속으론 잡생각에 내가 날 잡아먹고 있는데 무슨 휴식이 될까? 또 잠깐의 틈을 타 작은 화분 안에 살고 있는 어린 화초들에게 물을 주고 다시 글 책상에 앉았다. 잡, 잡, 잡잡 거리며 잡스럽게 살고 있다.

   


어떤 이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달콤한 파이나 케이크 한 조각에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시간이 최고의 휴식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바람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강가를 휘휘 가르며 달리는 페달이 좋아 땀이 흠뻑 젖도록 운동하는 그 시간이 휴식이 된다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뻐근한 어깨를 사우나에서 받는 마사지로 일주일의 힘듦에 보상을 받으며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순간순간 나름의 행복을 찾는 시간이 휴식이라 말을 한다. 하지만 케이크를 먹으며 하루 스케줄을 생각하여 마음이 바빠지고, 바람을 맞으며 돌부리를 피하려 불안해 식은땀이 나고, 마사지를 받으며 마사지하는 사람의 힘듦이 온몸에 전해져 미안해할 거 같은, 나에게는 휴식이 아니라 그저 바쁨이고, 불안이고, 안쓰러움이다.

   

피아노 악보에는 1/32의 찰나 같은 쉼표에서부터, 전 마디를 쉬어야 하는 온쉼표까지 지겹도록 가만히 다른 악기의 노랫소리를 듣고만 있어야 하는 쉬는 시간이 있다. 너무 심취해 켜다 보면 바이올린 줄도 끊어져 버리는 쉼의 시간이 있고 팔과 손가락에 힘을 주어 잡아당기는 말꼬리로 만들어진 활도 지치면 두두둑 끊어져 버리는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의 쉼도 자기의 온몸을 던져 표현되는데 하물며 인간의 쉼이 필요할 때 우리는 어떻게 표현될까? 어떤 의사가 응급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과로사라고 했다. 희생정신이 강한 의사여서 남의 생명만을 살리려다 정작 자기의 몸에는 휴식의 시간을 주지 못했으리라. 요즘은 과로사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휴식의 시간이 절실할 때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하려 줄을 서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주위를 둘러본다. 혼자 컴퓨터를 두들기는 사람, 전화를 하며 웃고 있는 사람, 친구와 함께 수다를 떠는 사람들... 단 한 명도 커피를 마시며 하늘을 보는 이도 없고, 골똘히 사색에 잠기는 사람도 없다. 진정한 휴식이란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린다는 표현으로 하루를 살면 허무함에 땅이 꺼지고, 1시간 단위로 할 일이 많으면 바쁘다는 말로 몸이 지쳐버려 침대로 꺼져버리고... 정말 나다운 휴식이 뭘까? 커피를 마시며 하늘을 보며 텅 빈 머리로 가만히 커피 맛을 음미하는 게 나의 휴식일까?

   

휴식이란 말을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나 싶다. 어찌 보면 순간순간 쉼을 가지는 아주 단순한 숨쉬기 같은, 내가 시작하기도 전에 자동반사적으로 쉼을 숨 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휴식은 여름에 떠나는 휴가도 아니고, 공부를 하고 난 다음의 쉬는 시간도 아니다. 잠깐의 틈으로 화초에 물을 주는 순간이 쉼이다. 대신 화초는 내가 주는 물로 자란다는 행복이 나에게 전달되면 그만이다. 커피를 주문받으며 반갑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저 Paul처럼... 그저 쉼이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찰나 같은 것이다. 순간의 행복이 반복되면 쉼도 연속이 된다. 자! 바닐라 라테를 마셔보자. 달달한 행복을 마셔보는 거야. 나의 찰나의 휴식을 위하여^^


작가의 이전글 귀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