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랜Jina Apr 11. 2020

한마디로, 재수 좋은 여자

작년 여름 비가 주룩주룩 오는 어느 날,

나와 언니는 당고개 어딘가를 빙글빙글 돌며 집을 찾고 있었다. 나의 초행운전과 언니의 전화 미숙으로 상대방이 답답했나 보다 검정 우산을 들고 애타는 모습으로 어르신들이 주로 쓰는 헌팅캡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저만치 서있다. 서로를 확인했다는 듯 손을 흔드는 걸 보니 우리가 드디어 제대로 찾았나 보다.


무슨 비밀 접촉을 시도하는 사람들처럼 조용하고 은밀한 장소를 가는 듯 살짝 음침한 지하로 우리를 안내했다. 일단 주차는 담벼락 밑에 바짝 붙이라는 당부를 몇 번 하는 걸 봐서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빌라 같은 곳이고 지하까지 있는 걸 보니 지어진 지 오래된, 아! 생각났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본 딱 그 반지하를 생각하면 정확하겠다. 어라? 혹시 당고개에서 기생충 촬영을 했나 할 정도로 그 동네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철학관과 당고개'


당고개라고 하면 시골 동네마다 하나쯤은 있을법한 이름인데 정말 서울에 그런 이름의 지명이 있다는 거에 일단 놀랐다. 토속적인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옴직한 지명으로 직업과 장소의 궁합이 딱이다. 특히 고개라고 하면 옛스러운 단어로 언덕이나 둔덕 아니면 야트막한 작은 산 정도를 고개라 칭하는데 그런 말이 아직도 존재하고 지명으로써 제기능을 다하는지 새삼스러웠다.


이름 하나 가지고 유난이다 싶겠지만 난 실은 사주팔자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사주를 보는 장소가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동네 이름이니 왠지 나의 미래가 좋은 쪽으로  떨어질  같은 예감이었다. 매년 사주를 보는 건 아니지만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으면 보고 아니면 마는 뭐 그 정도의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미국에 살다 보니 자연스레 철학관과 멀어지긴 했지만

한국에 나가는 해엔 꼭 챙겨야 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이번해에는 당고개에 사주를 잘 보는 사람이 있다길래 두 번도 묻지 않고 찾아 나선 길이었다. 아무튼 당고개가 주는 이상야릇한 이름의 맛에 끌려 한국에서 운전이 아직은 서투른 실력으로 처음 가보는 동네 그것도 가파른 언덕에다가 길도 좁은 골목길을 몇 바퀴 돌고 돌아 막 주차를 하고 내렸으니 모자를 눌러 쓴 그분이 안 반가울 리가 있겠나. 손까지 흔들어가며 반가움을 표하고 얼른 뒤따라갔다.


반지하다 보니 몇 개단 아래로 조그만 문이 보이고 침침한 집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으면 거실이고 한눈에 방세개가 보이는 그런 구조였다. 이미 예약을 하고 와서인지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보통 잘되는 집은 예약을 하고 가더라도 옆방에서 기다리는 게 다반사고 정말 잘되는 집은 예약도 받지 않고 무작정 기다려야 해서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는 거에 비하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일단 신뢰도의 점수는 깎고 봐야겠다. 왼쪽 방으로 안내되었다. 부처상이 있는걸로 봐서 사주팔자를 책으로만 푸는 곳은 아니고 나름 신을 모시고 신내림을 받은 (?)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주팔자를 책으로만 풀면 왠지 신뢰가 가지 않을텐데 그렇다고 애기 동자나 처녀점 같은 완전 신내림만의 점도 신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딱 보아하니 사주명리학을 공부하신 약간의 스님 정도? 그러니까 절에서 생활하다가 어떠한 계기로 일반 생활을 하시며 동양철학을 하시는 그런 포스였다. 나이도 좀 있으시고 메너도 있으시고 반듯한 외모에 반듯한 말씨라 나 또한 정중한 모습으로 마주 보고 앉았다.


생년월일시를 차례로 넣고 이름을 말했다.

하얀 종이 위에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죽죽 한자를 펼쳐 쓰셨다. 주술을 나열하듯 이리저리 줄을 세우더니 손가락 끝을 이리저리 만져가며 입으로는 중얼중얼 장단을 치듯 삼박자가 일치한다. 손가락 끝을 옆 손가락 끝으로 옮길 때마다 말이 바뀌며 바뀌는 말마다 한자의 모양과 줄이 달라졌다. 경험치가 많이 묻어있는 몸짓이다. 몇 번을 거듭하더니 한 장이 다 채워지고 펜을 책상 위에 딱 놓으며,


"자, 김지나의 사주에는 금(金)이 0개고 토(土)가 0개고... 수(水)가 없네요 아뿔싸! 골고루 오행이 있으면 좋은데 하나가 빠졌네요 타고난 사주는 큰 나무입니다.... 세 개의 나무가 받치고 있는데..... 이번해부터 물이 들어옵니다..... 물이 없었는데 다음해부터 들어오니 좋아지겠네요.....(부모덕부터 이름 운세며 인생을 통틀어 막힘없이 주~욱 이야기한다 전체적으로 좋다는 말... 혼자서 말씀하시더니 끝으로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셨다)
"남편이랑 이혼수는 없나요?(왜 이런 말을 물었냐면, 계속해서 내가 센 팔자라 남자한테 만족하지 못한다하니..)"
"음... 없긴 한데 계속.... 그래도 좋긴 한데....(뭐야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딱 한마디로 나오질 않나 보다)"
"제 직업은 어떨 거 같나요?(내심 글쓰기를 하고 싶은 열망에 그리고 그때까지는 책을 출간한다는 꿈이 일도 없었으니...)"
"음... 물이 들어오니 세상 사람들에게 나오려는 욕망이 있고 또 그렇게 될 거 같아요 문인이 될 거 같은데...(야호!! 여기 대박점집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잘 될까요?(엄마의 처음과 마지막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미래다)"
"나무 세 개가 아이들을 받치고 있어요 나무가 무너지면 아이들이 무너져요 아이들은 나무에 의해 잘 자랄 겁니다" (난 이 말이 부담으로 느껴졌다 내가 무너지면 아이들도 무너진다는 무시무시한 말이 아닌가? 난 이 말이 두고두고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책임감에 부르르 떨 이야기이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내 마음에 남은 말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문인이 되어 유명해질 거라는 좋은 예감과 아이들이 내 손에 달렸다는 무거운 책임감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쏠려 들리지 않았던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길과 창문 사이의 간극이 짧아 더욱 처량한 음악처럼 구슬프게 들렸다.  절향이 진득하게 묻어 나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해 방안으로만 맴돌아 저편 세상과는 동떨어진 세계에서 미래를 마주한 기이한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일부러 빠트리고 싶은 한 가지가 남아있다. 중간에 이런 말을 했다. 굳이 기억하고 싶은 말은 아닌데,


"한마디로 당신은 재수 좋은 여자입니다"


재수 좋다란 말에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어느 날 리어카를 끌고 나간 김첨지가 운 좋게 돈을 많이 벌고 그 돈으로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갔지만, 아내는 오늘따라 운이좋아 늦게오는 남편을 기다리다 사늘한 주검이 되었다는 운이 정말 없었다는 역행되는 그런 이야기...  재수가 좋다는 것은 행운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지만, 그 말속에 숨은 재수가 좋은 이유가 문제인 것이다.


나처럼 단어에 의미를 많이 두는 사람한테 '한마디로 당신은 재수 좋은 여자다'라는 말은, 남자 입장에서 봤을 때 남자에게 잘해서, 남자를 위해서, 남자가 잘되게 해주는 그런 뜻에서 재수가 좋다라고 들리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재수가 좋으면 남자는 나보다 못나서 내덕에 재수가 생기는 것이다. 마치 재수 좋은 내가 현진건의 리어카가 되어 운이 좋아 돈을 벌지만, 아내는 '리어카의 운' 때문에 정작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여인이 되는 듯하다.


뜨거운 감자를 입에 넣고 먹을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재수좋은 여자가 미흡한 단어로 전락하다가도 남편이 나에게 우쭐한 말을 하면 속으론 그런다. '흥 그래봐야 내가 재수가 좋아서 당신도 재수가 좋은거거든?' '다 내덕이거든?' 이러면서 위안하고 좋은건 내가 재수가 좋아서이고 나쁜건 그탓이고... 재수 좋다는 한마디에 이살 붙이고 저살 붙여 재수가 오히려 날아가버릴지도 모르겠다. 원래 좋은 일도 이리저리 불어대면 복도 달아난다고 하는데... 아무튼 난 이 말이 그냥 삼킬 수도 그렇다고 싫다고 버릴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를 입안에 넣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점을   건지 잘못  건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 오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당고개 다녀왔다"
"어.. 드디어 갔구나 뭐라든?"
"뭐.. 비슷하더라 신랑은...... 애들은...... 근데 참 희한한 말 하더라"
"뭐라 했는데?"
"훗, 나더러 재수 좋은 여자란다.."
작가의 이전글 '빈 둥지'를 지키는 미국 엄마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