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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Apr 11. 2020

이젠,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원래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맞는 말이 되었다. 하나로 뭉쳐있던 지구가 일일생활권에 든 지가 오래인데, 이제는 100년이 흐른 뒤에나 다시 일일생활권이 될듯하다. 모든 나라가 일제히 빗장을 걸었다. 자기 나라에서만 있으라, 집에만 머물라는 'Stay-at-Home'만을 외쳐댄다. 정상적인 일일생활권으로의 진입은 상상할 수 없을 것처럼 모든 게 멈춰버렸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뭉쳐야 산다' 말을 듣고 자랐다.

아마 전시 중에 이런 말들이 나왔을 것이고 남북이 분단된 현재까지 아! 코로나 19 이전까지 거의 구전식으로 전해오는 말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다. 이 말은 가정에서의 단합을 강조하는 말이었고 나아가 정당이나 정치적인 발언에서도 빠지지 않는 저마다 내놓는 '필수 구호 아이템'이었다. 군대에서는 군기를 잡는 언어로 이말만한 게 없었을 것이고 학교나 학급의 단합을 위하거나 나 같은 타국에서 한국인끼리의 단결어로도 충분하지 싶다.


따로 더 따로, 따로 또 따로


이제는, 아니 앞으로는 절대 쓸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신조어가 생긴 셈이다. 꽃미남이나 꽃중년 등의 신조어처럼 코로나 19 이후로는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말이 생명의 구호가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따로 또 같이'라는 말도 있다. 그 말도 이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따로 더 따로' 아니면 '따로 또 따로' 재밌는 말이 되어버렸다. '따로국밥'이라는 말도 있다. 재밌는 국밥 이름이지만 이 시대의 음식 이름으로는 아마 최고이지 싶다.


대기업들도 앞다퉈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 앞장섰다.

다음 포털 사이트는 Daum의 영문으로 붙어 쓰여있던 알파벳을 하나하나 띄어쓰기와 함께 '우리 다음에 보자'라는 말로 자가격리를 부축였고, 맥도널드도 노란 모자를 띄어 놓았고, 구글의 알파벳 붙임도 떨어지는 영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알렸다. 아우디 자동차의 겹쳐있던 4개의 원이 거리두기를 했고, 이베이 또한 글자 사이의 간격을 두어 모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도록 했다. 잘하는 일이다.




시신을 거리에 방치한다는 보도도 있고 이러다 24만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통계로 불안에 불안을 더하고 있다. 마스크나 방호복이 없어서 의료진들의 아우성이 들려오고 의료진마저 코로나 19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안타까운 소식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냉동차량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과 그 시신을 싸는 바디백(Body Bag)도 동이 났다는 말도 나오고 사후에 처량함까지 더하는 사진들이 인터넷의 전파를 타고 집에만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도 전해온다.


죽음을 함께하지 못하고 홀로 보내야 하는 그 가족들의 슬픔을 어찌 감당할까? 생후 6주 만에 코로나로 숨을 거둔 안타까운 일도 있고, 한인 고등학생은 보험이 없어서 병원에도 못가보고 심지어 코로나 인지도 모른 체 하늘나라로 갔다는 말도 들린다. 자녀가 6명이 있는 엄마는 무전기로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는 슬픈 스토리며 아마 코로나 이후 죽음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낮은 계층의 사망자가 많다.

이는 보험이 없는 이들이 진료받기도 전에 혼자 사투를 벌이다 마지막에 911타고 가다 사망하고 사망 후에 확진자가 될 가망성이 크다. 왜냐하면 보험이 없는 사람들 특히 불법체류자들은 병원을 갈 수도 없고 간다 해도 코로나 19 진료비만 무료이고 확진이 되어 병원에 가면 치료비는 개인부담이다. 그 치료비는 몇천만 원이라 평생 갚아도 못 갚을 비용인데 누가 쉽게 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감기처럼 아프다가 최후에 엠블런스 타고 가서 죽는 것이다. 참으로 이런 비극이 없다.


이제야 마스크가 비말감염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마스크를 쓰라한다. 단 1%의 가능성이라도 바이러스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마스크 대란을 염려해서 그런다는 후문이 정말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같은 물질 만능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말이 상식적으로 통하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래도 마스크가 없으면 스카프라도 쓰는 게 좋을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뭉치면, 당연히 잘 사는 줄 알았다"


단 한 번이라도 뭉치면 오히려 죽는다는 상상을 해보았을까?

눈을 조그맣게 굴려 뭉쳐지면 단단하고 커다란 눈사람이 된다는 이미지로 뭉침의 단결을 외쳐왔고 한 명이 하지 못하는 일도 여러 사람이 함께하면 못하는 일이 없다고 배워왔던 우리가 아닌가? 그렇게 살지 않는 미국이나 유럽의 개인주의를 얼마나 비난했던가? 그런데 이제는 뭉치면 다 죽는다. 흩어져야 산다니 어불성설이다. 사회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말도 이젠 누구나 이미 알고 있었던 말인 듯 행여 누가 내 옆에 내 뒤에 있을까 불안하다. 


미국은 매너의 나라다. 남과 살짝 부딪힌다거나 살짝 스치려는 몸짓만으로도 ‘쏘리’를 연발하는 나라다. 그렇기에 지금의 거리 두기가 그다지 생소하진 않다. 그래서 정이 없었다. 싹 뚝 잘린 단무지 같은 냉정함이 있어서 그걸 이기주의라 칭했다. 세월이 흐르니 나 또한 이들의 몸짓이 더 이상 단절의 의미로 다가오진 않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에 가면 내 발을 밟아도 그저 힐끗, 마트에서 유심히 물건을 찾고 있는 좁은 통로임에도 내 앞을 그냥 휙 지나치며 옷깃이 스쳐도 그저 힐끗 보는 한국 사람들의 매너에 고개를 갸우뚱해지고 있을 때이다. 그쯤의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은 한국도 180도 상황이 바뀌었다.

   



스치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버스에서 앞사람이 잔기침만 해도 뒷사람은 몸을 자동으로 뒤로 젖히고, 그 앞사람은 고개를 더 앞으로 숙이는 게 자동반사적인 상황이 되었단다. 부딪치기는커녕 미국같이 스칠까 봐 노심초사가 되어버렸다. 잘된 일인지 안 된 일이지 그게 메너가 되어버렸다. 한 번도 변치 않았던 말들도 뒤집어져야 진리가 되어버린 세상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이 어떻게 그전과 같을 수가 있을까? 코로나 19가 모든 걸 바꾸어버렸다. 


예수 탄생을 기해 2020년이 되었다.


너무 긴 세월을 거듭해 헤아렸나 보다. AD와 BC로 구분되었던 기원전과 기원후의 나뉨의 역사를 헤아리는 숫자가 천 단위를 두 번 넘었으니 이제는 코로나 원년 1로 다시 시작되어야 할 듯하다. 홍수로 인한 노아의 방주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었고, 예수 탄생을 기해 세상의 흐름이 바뀌었었다. 모든 게 멈춰버린 지금이 바뀔 시점이다. 지금 사는 우리 모두는 새로운 세상을 함께 보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숨죽이고 서있고 바꾸어야 한다.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Stay-at-Home을 따르면,
 반드시 끝이 있다


전염병이 아무리 무섭다지만 전세계적으로 1억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독감도 끝이 있었고, 더 올라가 중세시대의 흑사병도 끝이 있었고, 지금의 중국도, 그리고 이탈리아도 조금씩 확산의 곡선이 완만해지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21세기가 아닌가? 흑사병의 중세시대도 아니고 스페인 독감이 있었던 세계대전의 전시상황도 아니다. 우리에겐 세계 어디에서나 소통하고 공유할 수있는 인터넷이라는 공유망이 있다. 반드시 끝은 있으니 조금만 힘을 내보자.


우리는 코로나 19의 첫 번째 해의 첫 번째를 겪는 지구 인류상 처음이 된 사람들이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2020년이 흐른 뒤, 코로나 2020년이 되어 그때 또 한 번 어떤 것으로 인해 지구가 지금처럼 모든 게 멈춰버리면 또 그때 다시 말하겠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어떠한 말이 또 뒤집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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