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ㅣ브런치를 먹다 스마트폰을 찬미하다
'브런치'란 영어로 아침과 점심을 줄여서 쓰는 말인데, 우리 어린 시절 어떠한 단어들을 줄여서 말하거나, 조합해서 만들어진 말들이 많았었나? 경찰을 ‘짭새’라고 해서 경찰의 위상에 정면으로 도전하진 못하지만 우리들끼리 비아냥거리는 단어를 만들어 소극적이면서도 통상적인 의미로 반어적이면서도 재미를 가미한 속어를 쓰긴 썼다.
선생님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시고 어깨는 구부정하시고 지휘봉 하나 옆에 끼시고 걸어오시는 모습에 ‘꼰대 온다’라는 말로 격하시키며 도망 다니기에 바빴고, 아버지 나이뻘쯤 되시는 분이 아이들 훈계하시는 모습에 어른이기에 직접적으로 반항은 못했지만 우리끼리는 ‘저런 꼰대는 되지 말자’라고 다짐하며 ‘꼰대’라는 강하게 비난 섞인 말로 짭새와 함께 안면에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숨어 버릴 수는 없는, 비루하게 도망은 가지만, 한 마디쯤 내뱉고 싶은 마음에 그런 이름을 만들었지 싶다.
나도 이제 그런 아저씨, 아줌마 나이쯤 되어보니(절대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세대 차이 사이에서 오는 잔소리 겸, 그런 그런 나이 차이 혹은 연륜 비슷한 마음에서 말한다는 것이 꼰대라고 지칭해버린 그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드니, 정말 내가 나이가 드나 보다.
그래도 여자들은 여자들끼리의 수다 떠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라 이런저런 말들로 상식선에서의 대화를 하기도 하고 또 남자의 머리 구조와 달리 청각이 발달되어 굳이 배우지 않아도 설령 모르는 단어를 말해도 센스 있게 받아치는 여유가 있는 반면 남자들은 청각보다는 시각이 발달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들리지 않는다는 걸 내 남편이 여실히 보여주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내 귀를 의심할만한 말을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슬며시 물었다.
“여보, 브런치가 무슨 음식이야?”
“엥? 브런치가 뭐냐고 묻는 거야?”
“직원들이 매일 브런치 먹자고 하는데 물어보질 못하겠더라고...”
“헐~~”
설마 하는데 진짜 나에게 물어본 말이다. 남편은 해외를 다니며 무역을 하는 비즈니스맨이고 회사에 직원들이 있고 동창도 가끔 만나는 아주 평범한 사회인인데, 당연히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고 미팅도 하는 현대인인데, 그것도 미국에 살며 영어를 써야 하는 기업인인데 브런치 같은 현대 언어를 모른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하고 정말 어이없이 반문하고 웃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부터 브런치라는 말을 보통 상식적인 말처럼, 누구나 알 거라고 누구나 써야 하는 단어로 여기게 되었을까? 우리가 신세대도 아닌데.. 물론 브런치라는 말이 여기에서는 흔히들 쓰는 단어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어의 조합을 우리끼리 만들어 사용하고 마치 단어장에 버젓이 있는 듯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브런치라 하면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의 중간쯤에 시간으로 말하면 아침 10시 반에서 11시 사이쯤 간단하지만 그렇다고 시리얼처럼 얼렁뚱땅 후루룩 먹어버릴 수 있는 가벼운 식사는 아니다.
샌드위치를 먹더라도 식빵에 버터나 잼을 바르는 간단한 아메리칸 블랙퍼스트가 아닌 제대로의 샌드위치 즉 버터를 바르고 햄도 얄팍하게 넣고 상추나 토마토, 아보카도 등 여러 가지를 넣고 소스도 허니 머스터드나 케첩을 뿌리고 그릴에 넣어 따뜻하게 먹는 메뉴이다.
이런 게 브런치인데 남편은 브런치가 레스토랑에서 파는 유명한 메뉴쯤인 줄 알고 남들에게 물어보기엔 자기만 모르는 거 같아 창피했었나 보다. 아내인 나에게 물어봤으니 다행이지 정말 직원에게 물어봤다면 꼰대가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음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다
브런치는 간헐적 다이어트와 딱 맞아 떨어지는 아이템이다
브런치는 요즘 한창 유행인 간헐적 다이어트와 어찌 그리 딱 맞게 떨어지는지 모른다. 간헐적 다이어트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적어도 16시간 동안 위를 완전히 비운 상태로 위를 쉬게 함으로써 텅 빈 위가 운동을 하며 지방을 태울 수 있고 지방뿐 아니라 새로운 세포도 그때 생겨난다니 젊어질 수도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니 이르게 저녁을 먹고 최대한 아침 식사를 늦게 해야 하는데 점심시간까지는 기다리기 어렵고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 즉 그 중간의 브런치는 그야말로 기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저녁 6시에 저녁 식사를 하고 아침 10시 이후에 브런치를 먹는다면 일단은 다이어트에 성공인 셈이다.
뇌가 섹시한 여자를 ‘뇌색녀’라 부르고 ‘따아’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라든가 ‘소확행’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이생망’은 너무도 웃기게도 이번 생은 망했다 라는데, 아 최근에 들은 말이 있다. ‘치매녀’는 다행히도 치명적인 매력적인 여자란다. 참 좋은 말이다. 하하... 그래도 이런 말들은 그나마 앞 자만 따서 말하는 줄임말이라 한번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재밌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엉뚱한 말들로 이해 안 되는 외계어도 많다. ‘혼코노’라는 말을 아는가? 일본말처럼 들리지만 혼자 코인 노래방에서라는 뜻이란다. 또 하나 ‘나일리지라’는 말은 나이가 많다는 것을 내세워 대우받기를 바라는 어른들을 지칭하는 나이를 잊어라라는 소위 우리 세대의 꼰대와 비슷한 꼴사나운 어른을 비아냥 거리는 아이들의 말이지 싶다. 이것도 아닌가? 모르는 말이니 누가 자세히 알려주면 속은 후련하겠다.
나와 다름을 찬미하고 다르지 않으면 도태되는 사회
세대가 다름이 여러 면에서 느껴지긴 하지만 이런 짧은 말을 쓰는 이유는 우리 세대에 비해 요즘 젊은이들은 할 일들이 많아져 시간도 없거니와 어릴 때부터 상대가 보이지 않는 핸드폰으로만 대화하고 놀다 보니 진짜 사람들과의 대화가 꺼려지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세대들이니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긴 이야기를 되도록 짧게 하고 자기들만의 언어로 어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에서 오는 희열도 짜릿하리라.
예전엔 나와 다름을 의심하고 비난하고 공통 사회적인 일들을 보통 시민이라 여기며 함께 지향했는데 요즘의 현대인은 나와 다름을 찬미하고 나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개발하려는 자들에게 환호하고 오히려 다르지 않으면 도태되는 사회가 되었다.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인간의 얼굴이 모두 다른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찌 하나가 될 수 있으랴. 마찬가지로 한글이 어느 문자보다도 최신형인데 얼마나 다양한 언어로 쓰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언젠가 나도 새로운 말을 만들었다. 나보다 먼저 만들어 놓고 이미 사용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80세 정도의 나이 때를 ‘노꽃남’이라며 글을 쓴 적이 있다. ‘미시족’은 결혼한 여자이면서 아이를 낳았지만 아름다움을 방치하지 말라는 말로 여성들을 옭아맸고 ‘꽃중남’은 중년 남성들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관리를 하라는 말인데 아저씨의 어수룩한 자태에서 벗어나게는 했지만 역시 막 아저씨의 대열에 서려는 뭇 남성들을 옭아매어 인생은 60부터라는 환갑잔치도 옛말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70세가 인생의 절정기가 되어 80세가 되면 노꽃남이나 노꽃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만든 말이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려다 브런치의 단어를 생각하고 남편이 물어본 브런치라는 메뉴가 뭐지 라는 어이없는 물음에 긴 글이 되어버렸다. 남편은 꽃중남이 되려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절대로 신지 않겠다던 양말 대신 덧신을 신으며 아저씨 티를 안 내려 노력하고, 나는 미시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줌마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 나름 얼굴에, 옷 입는 스타일에 매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의 조합으로 운운된 브런치를 지금 모르면 어떠랴! 오늘부터 나일리지라를 알고 꽃중남, 꽃중녀, 노꽃남이 되면 되지. 우리 또한 휙휙 넘어가는 빠른 테크놀로지에 동참하려는 눈물겨운 속도 맞춤에 스마트폰과 함께 모두가 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 오늘은 어떤 브런치를 먹을까? 어떤 멋진 옷을 입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