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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un 18. 2020

미주 한국일보 41회  신춘문예 당선작

'창문으로 보는 드라마'

이 녀석은 일어나자마자 내 자리를 비집고 들어 온다. 일단 얼굴을 내 베개에 얹고부터 푸르스름한 아침맞이가 시작된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고 긴 털 때문에 까만 눈망울을 덮어 버리지만, 아침부터 뭐가 그리 궁금한지 털 사이로 보이는 시선을 조용하고 푸른 나무에 고정시킨다.     


이 녀석은 한국에서 왔다. 거리에서 홀로 헤매다 어떤 기관에 들어가고 입양을 기다렸지만, 턱이 돌출되어 그 누구의 간택도 받지 못해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우리 집에 올 운명이었나 보다. 해외입양 기관으로 서류가 흘러가고 어찌어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왔다. 아마 수면제에 취해 케이지에서 하루를 그것도 짐칸에 수많은 케리어와 뒤섞여 짐짝처럼 가수면 상태로 하늘 안에 갇혔었겠지.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서인지 케이지에 들어가는 것을 거의 죽음의 공포로 여긴다.      


오자마자 대소변 교육을 위해 케이지에 넣으니 손톱이 빠질 만큼 난리를 치며 필사적으로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걸 보고 알았다. 서류상에도 분리불안증이 있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버려진 공포가 그대로 내재되어 있는 작고 여린 생명체임이 분명하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엄마 없이 버려졌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케이지행이 안 되니 집안에 그대로 녀석을 놓고 나가야 하는 불안감이 컸다. 잠시라도 문을 열고 나갈라치면 극도의 공포로 그리 서럽게 울 수가 없다. 마치 엄마 잃은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식구가 올 때까지 그대로 문 앞에 엎드려 꼼짝 않고 가족을 기다리곤 했다. 이런 게 분리불안이구나. 아직 가족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없는 게 당연하고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있으니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믿음을 심어줘야 했다.     


잠시라도 떨어질라치면 간식을 많이 준다든가, 만족스러운 눈빛이 보일 때까지 꼭 끌어안고 머리와 몸을 쓰다듬어주어 사랑을 확인시켜준다든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여기저기 숨겨놓아 주인이 없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꺼리를 만들어줘야 했다. 그러자 조금씩 우리가 가족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는지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가고 우리의 들고남에 별 신경 쓰이지 않는지 외출하고 돌아온 재회의 기쁜 세라머니 시간이 점점 짧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녀석의 중요한 놀잇감이 생겼다. 우리 인간으로 말하면 바깥세상의 돌아가는 판이 궁금해졌나 보다.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커다란 창문에 기대어 종일 세상을 관찰하며 마치 흥미로운 티브이를 보는 것 같다. 청설모의 출현만으로 흥분이 되어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사냥하듯 이리저리 법석을 떨며 뛰어다녔고 새가 떼 지어 날아가는 모습만 봐도 소리치며 날아오를 듯한 기세를 보였다. 사슴들이 잔디에 발을 잠시 디딜라치면 컹컹 소리치며 창문에 달려들어 창밖의 동물들도 이 녀석의 유리창 너머의 호통에 움찔하며 달아나기 일쑤였다.      


그러다 어라? 홈그라운드의 녀석들이 생판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가짜 위용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창밖 동물들은 이 녀석이 집안에서 혼자 날뛰는 것에 더 이상 동요되지 않고 원래 하던 데로 유유자적했다. 청솔모는 친구들과 추운 나뭇가지를 발바닥에 땀나도록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숨바꼭질하듯 뛰어다닌다. 새들도 뭉쳐 다니며 우리 녀석의 눈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사슴 가족도 줄지어 서서 이 녀석의 반응에 놀라기는커녕 한 번의 고갯짓으로 다리를 곧추세우며 그저 응시만 하더니 곧장 그들의 길로 느긋하게 가버린다.      


애가 타는 건 우리 녀석뿐이다. 아직도 상황 판단이 안 되는지 혼자만 바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컹컹 짖었다가 흥흥거리며 포기했다가 엎드려버린다. 그래도 그들의 행동이 궁금한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알을 열심히 굴려 보초를 서는 듯해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녀석이 세상을 보는 것처럼 나도 그들의 드라마 같은 세상을 같이 보기 시작했다.     


청설모가 원숭이처럼 나무를 이리저리 날쌔게 날아다니다 땅으로 내려오면 자기 세상이 아닌 남의 영역에 들어가는 듯 서서히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기어간다. 서서히 발레 하듯 걷다 도토리를 주우면 두 손으로 잡고 빠르게 비빈다. 그러다 우리랑 눈이 딱 마주치면 얼음이 되어 버린다. 비비던 손뿐 아니라 눈동자 하나도 흔들림 없이 순간적인 생명의 위험을 느끼듯 숨죽여 우리를 관찰한다. 이내 우리가 창살 안, 그러니까 자기를 절대 헤칠 수 없는 유리안 동물이라는 걸 알아채고 넓적하고 자기 몸보다 커다랗고 풍성한 꼬리털을 흔들며 유유히 돌아가 버린다.     


이 녀석이 이곳에 온 지 벌써 2년이 넘어간다. 내가 향수병으로 밤낮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적응한 시간이 오래 걸렸듯이 이 녀석은 분리불안증으로 우리를 자기의 가족으로 믿고 따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가족뿐 아니라 변화된 세상에도 적응이 되었나 보다. 이제는 더 이상 청설모의 갑작스런 출몰에도 동요되지 않고 몰려다니는 새들의 꺽꺽대는 날갯짓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슴 가족의 매서운 눈빛도 마주하며 시선을 고정할 줄도 알게 되었다.


이 녀석이 보는 세상이 내 세상이면 어떨까? 세상사 아무런 걱정 없는 날들이다가도 훅 치고 들어오는 것들에 현혹되어 물불 못 가리고 날뛰다 또 언제 그랬나 싶게 조용해지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반드시 흘러간다는 걸 아는 눈으로 보면 편할 텐데 말이다. 지금처럼 조용히 관망하는 이 녀석의 엄마로서 해맑은 세상 바라보기를 같이하면 좋겠다. 달빛이 극에 찬 보름달이 밤을 넘어가는 새벽이다.



브런치를 꾸준히 하면서 조금씩 글쓰기가 수월해진 탓이었나 보다. 한국에서 온 반려견을 통해 나의 이민생활을 투영한 작품이 미주 한국 일보 수필부문 공모에서 당선작으로 뽑히는 영예를 안았다. 당선작이 1등을 뜻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신문사를 통한 등단 작가를 신춘문예 작가라고 칭하는지도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수필은 나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라 다른 장르에 비해 작가의 사고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진심이 묻어나는 글들이 세상 사람들과 공감될 때 글은 살아서 숨 쉬는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된다. 나의 미비한 글이 이렇게 멋진 날개를 달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 주신 한국일보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도 브런치를 통해 다음 포털 싸이트에 자주 노출해 주신 브런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저의글을 읽어 주시고 응원글 남겨주시고 구독해주신 브런치 가족 구독자분들에게 감사 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좋은 정보와 좋은글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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